사례 나누기

쉬운 한글로 쓰기, 소통과 배려의 시작

  • 등록일: 2023.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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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운 한글로 쓰기, 소통과 배려의 시작

김태경(한양대학교 한국어문화원 원장/ 한양대학교(ERICA) 교수)

지난해 한 카페에서 미숫가루를 ‘M.S.G.R’로 표시해 논란이 된 일이 있다. 해당 카페는 미숫가루뿐 아니라 여의도 커피를 ‘Yeouido Coffee’, 앙버터를 ‘Ang Butter’로 표시하는 등 메뉴판 전체를 로마자로 써 놓은 상태였다. 한글 설명 없이 로마자로만 표시한 메뉴판에 대해 불편함을 표시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이처럼 메뉴판에 로마자만 적어 놓는 세태에 대해 “영어로 써놓고는 진짜 외국인이 와서 영어로 주문하면 못 알아듣는다.”라며 지적하는 글이 올라왔고, 이에 “(영어 메뉴판을 쓰는 것이) 허세만 가득해 보인다.”, “영어로 쓰면 있어 보이냐” 등 공감하는 댓글이 무수히 달렸다.

이러한 로마자 표기 남용은 메뉴판에 국한하지 않는다. 아파트 이름, 상점 간판, 제품 이름(화장품명이 대표적이다.), 유명 호텔과 대기업 누리집의 항목들 대부분이 영어로 표시되어 있다. 영어를 읽지 못하면 호텔 예약이나 제품에 대한 문의도 어려운 상황이다. 이처럼 일상생활 영역에서 로마자 표기가 남용되고 있는 것의 가장 큰 문제는 영어를 읽지 못하는 사람을 사실상 배제하고 차별하고 있다는 점이다. 2019년 통계청 조사에 의하면, 55~64세는 90.3%, 65~79세는 48.8%만이 영어 학습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다. 그리고 저학력자와 저소득자일수록 영어 학습 경험이 적었다. 다시 말해, 한글 병기 없이 로마자로만 간판이나 제품명을 적음으로써 알게 모르게 이들을 정보로부터 소외시키고 알 권리를 침해하고 있는 것이다.

한양대학교 한국어문화원에서는 2023년 ‘경기도 국어문화진흥사업’을 수행하면서, 경기도 문화종무과와 협업하여 수원시와 안산시의 4개 구를 대상으로 옥외 광고물 언어 실태 조사를 진행하였다. 경기도 내 옥외 광고물(벽면 이용 간판, 돌출 간판, 공연 간판, 옥상 간판, 지주 이용 간판 등) 2,042개 간판에 사용된 문자를 조사한 결과, 한글 간판은 전체의 1/4에도 못 미친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외국 글자 중에서는 로마자가 단연 가장 많았으며, 그 중 로마자 약어도 20%가 넘었다.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Have it store’, 'D.MMELIER', 설명까지 영어로 적힌 ’2DOLLARS COFFEE - JUNBO SIZE 2SHOT', 아예 간판 전체가 영어로 표시된 경우도 포함하고 있다. 다음은 그 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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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더해 ‘컷트’(바른 표기는 ‘커트’), ‘밧데리’(바른 표기는 ‘배터리’) 등 외래어를 한글로 표기하기는 했으나, 외래어 표기법에 맞지 않게 쓴 간판도 부지기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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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곳곳에 외국 글자와 잘못 쓴 외래어 간판이 즐비하지만, 지방자치단체 대부분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아 사실상 손을 놓고 있는 형편이다. 옥외광고물법에 따르면, 간판 등 옥외 광고물의 문자는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원칙적으로 한글로 표시해야 하지만 면적 5㎡ 미만이거나 건물 3층 이하에 표시된 간판은 한글 표기가 없어도 과태료와 같은 제재를 받지 않는다. 경기도는 이에 지난 3월 조례 개정을 통해 간판 등 옥외 광고물 언어 실태 조사를 주기적으로 하고 개선 노력을 하도록 명시함으로써 상위법의 한계를 보완하겠다는 취지를 담았다. 경기도는 올해 조사 결과를 토대로 내년 중에 조사 범위를 확대하거나 시범적으로 간판 교체를 지원하는 등 개선 방안을 검토하겠다는 계획이다.   

사진<경기도 국어 바르게 쓰기 조례>

간판 등 옥외 광고물 표기를 개선하는 데는 적지 않은 비용과 노력이 들어가므로, 단기간 내에 눈에 띄는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해당 지역의 특성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지방자치단체들에서 적절한 법적 조치와 규정을 마련하는 것이 언어 환경 개선을 위한 움직임의 시작점이 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법적 조치는 단순히 제재의 차원을 넘어 교육과 인식 개선을 위한 프로그램과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 정부 부처 및 공공기관부터 나서서 외국어 사용을 줄이고 한글의 아름다움과 효율성을 강조하는 캠페인을 전개함으로써 국민들의 참여와 의식 변화를 이끌어낼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지금보다 많은 사람들이 한글을 자랑스러워하고 한글 사용을 당연하고 품격 있는 일로 여기게 된다면, 우리의 언어 환경은 저절로 개선될 수 있을 것이다.

사진(출처: 인천일보 20203. 10. 6. 1면 기사 갈무리 화면)
저자

김태경

  • 한양대학교 한국어문화원 원장  / 한양대학교(ERICA)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