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더하기

자가용 대신 메타버스 타고 오는 의사 선생님

  • 등록일: 2021.10.20
  • 조회수: 1,449

자가용 대신 메타버스 타고 오는 의사 선생님

최보기 / 작가, 서평가

최보기최보기
관악구청 청년정책과
구로구청 구정연구관
‘최보기의 책보기’ 연재 서평가
저서 『거금도 연가』, 『놓치기 아까운 젊은 날의 책들』, 『박사성이 죽었다』, 『독한시간』

#1 백두군 군청 대회의실에 군수를 비롯한 과장급 이상 간부들이 모였다. 곧이어 ‘백두군 웰빙시티 중장기 마스터플랜 수립 용역 최종 브리핑’이 있을 예정이다. 보고서 주요 내용은 ‘백두군 웰빙시티 비전, 목표, 중장기 로드맵’이고 용역 수행 기관은 ㈜*** 테크놀러지스다. 화려한 컬러 인쇄로 80쪽에 달하는 보고서는 그 색깔만큼이나 외국어 일색인 전문용어와 기술용어가 현란하게 채우고 있다. 용역 예산이 억 단위라서 그런지 ‘백두군 복지도시 중장기 기본계획 수립 용역 최종 보고회’와는 차원이 다르다.

잠시 후 회의실 불이 꺼지자 빔 프로젝터로 발사한 파워포인트 문서가 정면에 뜨고, 용역회사 대표가 마치 훈련된 조교처럼 빠른 말투로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한다. 시작하는 문장에 외국어가 벌써 3개지만 나 역시 저 외국어들을 어떻게 쉬운 우리말로 바꿔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지금 어려운 외국어 대신 쉬운 우리말 쓰기를 특정 개인의 역량에 맡기거나 강요하기 어렵다는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설마 용역회사 대표가 ‘공무원들은 전문용어에 약하니까 전문용어로 가득한 보고서를 만들어 가야 군수님 앞에서 엉뚱한 소리를 못 할거야.’라고 판단해 보고서를 일부러 어렵게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오해하는 사람도 가끔 있다.

그림 1. 웰빙시티 마스터플랜과 복지도시 중장기 기본계획은 차원이 다르다. 그림 1. 웰빙시티 마스터플랜과 복지도시 중장기 기본계획은 차원이 다르다. 


방대한 내용을 압축한 보고가 끝나고 질의응답 시간이다. 참석자도 용역회사 대표도 이미 예상했듯 특별한 질문 없이 묵직하고 어색한 침묵이 회의실을 채운다. ‘이렇게 질문이 하나도 없으면 곤란한데….’란 생각을 서로 하는 사이 회의 주재자인 군수가 운을 뗐다.

- 거, 내용이 굉장히 복잡하고 많은데 어쨌든 우리 백두군이 살기 좋은 복지도시가 되기 위해 필요한 정책들은 다 담고 있는 거죠?
- 네, 모두 담고 있습니다.

뒤이어 정책 실무를 총괄하는 부군수나 보좌관의 몇 가지 질문 뒤에 ‘국과장님들 질문할 것 없습니까?’ 질문에 침묵이 5초 이상 이어지면 회의는 끝나고, 용역은 성공적으로 진행될 것이다. 여기에 오해가 한 가지 있다. 군청 과장급 이상 공무원이면 수십 년 공직생활 동안 이 업무, 저 업무 안 해본 업무가 없다. 대부분 눈치만으로도 핵심을 가릴 줄 안다. 보고서 용어와 내용이 어렵거나 질문할 것이 없어서 그들이 침묵하는 것이 아니다. 침묵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보고서를 외국어와 전문용어 범벅으로 어렵게 작성하지 말고 쉬운 우리말로 쉽게 작성하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그들 중 일부는 이미 하고 있었으나 회의 자리에서 말을 안 할 뿐이다.

공무원들은 공개 회의 자리에서 자기 담당 국, 과, 팀 업무와 관련된 내용이 아니면 가급적 말을 아낀다. 괜한 말을 했다가, 설마 그게 해당 부처를 칭찬하는 내용일지라도 회의가 끝난 후 쓸데없는 오해와 시비를 부르기 때문이다. 용역기관 대표에게 ‘보고서를 쉬운 말로 작성하면 좋겠다.’라는 상식적인 의견을 내도 용역 발주 담당 국과장이 들을 때는 ‘지금 군수님 앞에서 나보고 일 똑바로 하라고 엿 먹이는 소리지?’라고 곡해할 수 있다. ‘보고서가 아주 훌륭하다.’라고 칭찬을 보태면 다른 과장으로부터 ‘누구누구에게 뭐 잘 보일 일이라도 있느냐’는 핀잔을 듣는 수가 있다. ‘내 담당 업무가 아니면 침묵이 금이다.’가 불문율인 이유다. 그러므로 용역기관 보고서는 앞으로도 계속 어려운 외국어와 전문용어로 채워지게 될 것이다.

#2 이번에는 공무원이 백두군청 노인들에게 새로 도입하는 ‘메타버스 원격의료시스템’을 설명하기 위해 경로당을 방문했다.

그림 2. 원격 진료 중인 의사와 환자그림 2. 원격 진료 중인 의사와 환자


공무원) 어르신들, 앞으로 메타버스 시스템을 이용하면 병원에 가지 않아도 의사가 어르신들 건강 상태를 체크해서 필요한 조치를 해드릴 수 있게 됐습니다.
어르신 1) 저게 뭔 소리여?
어르신 2) 의사들이 자가용 놔두고 맨날 버스타고 와서 건강한지 봐준다는 거여.

공무원) 이제 경로당 출입구도 배리어 프리라 휠체어로도 편히 다닐 수 있게 됐습니다.
어르신 1) 저건 또 뭔 소리여?
어르신 2) 배가 아프면 휠체어 타라는 거여.

자, 이 희극적 상황이 담당 공무원에게 ‘쉬운 우리말을 쓰자’라고만 하면 다 해결될 문제인가? 4차 산업 혁명 회오리에 신기술로 무장한 전문용어들이 하루가 멀게 쏟아지는데, 메타버스를 ‘강화가상현실’이라 한들 소통에 큰 도움이 되겠는가? 대통령이 논하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마저 쉬운 우리말로 대체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므로 공무원들이 어려운 외국어나 전문용어 대신 쉬운 우리말 대체어를 적극적으로 쓰게 하려면 그럴 수 있는 문화가 만들어져야 한다. 예를 들어 매년 쉬운 우리말을 잘 써 주민 소통에 공이 큰 기관과 공무원을 한글문화연대에서 선발하고, 대통령부터 해당 단체장까지의 상을 만들어 시상함으로써 승진에 혜택을 받는 식의 매우 구체적인 동기가 필요하다. 채찍만으로 해결하려 들면 공무원들은 법률과 규정, 조례 뒤로 숨어버린다. 쉬운 우리말 대체어 쓰기는 문화로 풀어야지 공무원 개개인 역량에 호소하거나 법으로 풀려 해선 한계가 있다.

(*이 글은 ‘쉬운 우리말 쓰기’를 강조하기 위해 필자가 지어낸 허구이므로 실제 발생한 일이 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