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더하기

길거리가 어지럽다

  • 등록일: 2021.10.13
  • 조회수: 1,778

길거리가 어지럽다

고영회

필자: 고영회
현 성창특허법률사무소
 대표변리사
 현 서울중앙지방검찰청
 형사조정위원
전 대한변리사회 회장
전 대한기술사회 회장 

간판은 왜 달까? 비싼 돈을 들여 다는 것인 만큼 다는 효과를 기대할 것이다. 서울 시내 거리에 나가면 수많은 간판이 달려있다. 우리말글 문제를 떠나서 저 간판은 제구실을 하고 있을까?

상표를 다루는 변리사로서 길거리에 있는 간판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길거리에 ‘CHANEL’이라 적힌 간판이 있다. 이걸 어떻게 소리 낼까? 영어로 공부한 사람은 ‘채널’이라 읽을 텐데, 실제는 ‘샤넬’이라 한다. 프랑스 말이기 때문이다.

‘RAISON’이란 이름을 단 담배가 있다. 여러분은 어떻게 읽는지 궁금하다. 내가 담배를 피울 때 ‘레이슨’ 달라고 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레종이라 부른단다. 담뱃갑 어디에도 담배 이름이 그렇다고 표기하지 않아 더더욱 고약하다.

길거리에 나가보면 여기가 한글을 쓰는 대한민국 서울인지 헷갈릴 때가 많다. 길거리 간판에 외국어를 표시한 것이 점차 많아진다. 이게 올바른 현상일까?

길거리 간판에 적힌 글자 성격으로 아래 5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① 우리 글 간판
아직은 이게 가장 많다. 다행이다.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 사람이 주요 손님이니 자기가 하는 사업을 우리글로 잘 알리는 게 지극히 상식이다. 사업을 망하게 하려고 작정하지 않는 이상, 손님이 알아듣지 못하게 적지 않는다.

② 외국에서 들어온 상표(브랜드)로 외국어만 적힌 간판
주로 화장품, 옷, 장신구, 자동차 등 고가 상품이 많다. 어찌 보면 참 오만하다. 자기 나라에서 자기 글자 달고 장사하는 것이야 뭐라 하겠냐만, 한글을 쓰는 우리나라에 와서, 우리나라 사람에게 물건을 팔면서 한글 표시도 없이 자기 글자를 달아놓고 있다. 우리나라 고객의 허영심을 이용한 것일까? 자존심도 버리고 저런 집에 가는 우리가 딱하다.

샤넬 광고<한글을 쓰는 한국에 걸린 외국어 상표, 자존심도 상하지만 알기도 어렵다>


③ 외국에서 온 상표인데 외국어 원어를 크게 쓰고 한글은 보일 듯 말 듯 작은 간판
이런 종류가 참 많다. 참 이해하기 어려운 간판이다. 베트남 국수, 햄버거, 튀긴 닭, 외식업체 상표에서 많이 본다. 이런 상표를 보면 내가 한국에 있는지, 외국 현지에 있는지 헷갈린다. 우리나라 고객의 생각이나 자세 문제일까? 곤란하다.

④ 외국에서 온 상표지만 한글을 크게 쓰고 외국 원어를 작게 쓴 간판
이게 정상이다. 가장 정상인 모습인데, 이런 간판은 찾아보기 어렵다. 인사동에 있는 스타벅스 커피점은 별스럽게도 한글 이름을 달고 있다. 인사동이라는 장소의 특별함 때문에 그랬다는 풍문이 들린다. 다른 곳에 있는 점포에는 원어를 그대로 달고 있다.

스타벅스 간판<인사동 거리에 있는 외국 상표 커피점>


⑤ 국내 상표지만 아예 영어로 적은 간판
국내에서 창업한 커피점이 많다. 온갖 영어 이름을 달고 있다. 커피는 영어로 이름을 달아야 팔리는 것일까? 요즘에는 튀긴 닭 상표에도 이런 유형이 많이 생기는 것 같다.

10여 년 전에 연변에 갔었다. 연변 간판은 크게 둘로 나누어 한쪽에는 중국 글, 다른 쪽에는 한글로 쓴 것이 눈에 확 들어왔다. 조선족 자치주인 것을 배려한 듯하다.

간판을 보는 시각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자유 경제를 밝히고 있으니 사업자가 좋다고 생각하는 간판을 마음대로 달 수 있어야 하며, 이를 규제하는 것은 기업의 활동을 막는 불필요한 제도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는 한국어를 공용어로 쓰고, 공용어를 적는 글자는 한글이라고 정해 두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쓰는 말은 한글로 적어야 정상이다. 국어기본법 2조에는 “국가와 국민은 국어가 민족 제일의 문화유산이며 문화 창조의 원동력임을 깊이 인식하여 국어 발전에 적극적으로 힘씀으로써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국어를 잘 보전하여 후손에게 계승하여야 한다.”라고 기본 이념을 정하고 있다.

이런 국어기본법의 정신을 생각해서 우리 길거리를 어지럽히는 간판을 정비해야 한다. 옥외광고물법에는 도시지역에 설치하는 광고물은 허가를 받거나 신고해야 한다고 적혀 있다. 이때 신고하는 간판은 ‘한글’을 쓰도록 유도하고, 다른 표시는 필요에 따라 같이 적을 수 있으면 충분하겠다.

국어기본법에는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국어책임관’을 지정하게 돼 있다. 광고물 설치 신고나 설치허락서가 접수될 때 책임관이 검토하여 신고를 수리하거나 허락해 주면 해결될 것이다.

길거리 간판을 보면 우리가 영어권 지배를 받는 나라인가 싶은 느낌이 온다. 우리글 한글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만든 이가 밝혀진 글자이고, 세계 언어학자가 우수한 글자라고 평가한다. 실제 배우고 익혀 쓰는 데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는다.

이렇게 우수하고 자랑할 만한 한글을 우리가 푸대접해야 하겠는가. 제도로 하나하나 이렇게 정비해 나가면 어지러운 길거리가 곧 깔끔해질 것 같다. 이런 것까지 간섭하냐고? 우리말과 우리 글자를 공용어로 하는 나라에서 당연한 일이다. 그래야 우리나라를 찾는 외국인도 글자를 보고서 한국에 왔구나 하고 느끼지 않겠는가! 무엇보다 당신의 사업을 잘 알리는 데 우리글이 가장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