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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itical economy, “정치경제학”인가 “경제학”인가 - 통역과 번역 사이에서

  • 등록일: 2023.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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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itical economy, “정치경제학”인가 “경제학”인가
- 통역과 번역 사이에서

강신준(동아대학교 경제학과 특임교수, 맑스엥겔스 연구소장)

1987년, 마르크스(1818-1883)의 <자본> 제1권(이론과 실천) 출판에 관여한 이후 평생을 마르크스 문헌 번역과 함께하면서 특별히 목에 걸린 가시처럼 불편했던 번역어가 하나 있다. <자본>의 부제목으로 달린 Politische Ökonomie(poltical economy)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대개 “정치경제학”으로 번역하고 있는 이 용어는 원래 애덤 스미스(1723-1790)가 자신의 <국부론> 제4편에서 “국민과 국가를 모두 부유하게 만들고자 하는 학문”의 이름으로 처음 사용하였고 이후 그가 지칭한 이 분야의 모든 학자에게 널리 보급되었다.

애덤 스미스는 이 용어를 완전히 독창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었다. 그는 당시 이미 전래되어 오던 이코노미(economy)라는 용어에 폴리티컬(political)을 결합시켜 이 용어를 만들어내었다. 이코노미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용어로 고대 그리스의 경제 단위였던 가족농장(노예농장)을 관리한다는 의미(즉 경제)를 담고 있었다. 그런데 애덤 스미스가 살던 시기는 고대 그리스 이후 계속 이어져 오던 가족농장 중심의 경제가 국가라는 훨씬 큰 경제 단위로 새롭게 묶인 절대주의 시대였다. 이제 가족농장의 명운은 국가 경제의 부흥에 달려 있었다.
국가를 단위로 하는 새로운 경제를 다루는 학문이 필요하였고 애덤 스미스는 그 학문을 지칭하는 용어로 political economy를 만들어낸 것이다. 즉 이 용어는 경제라는 의미의 economy에 국가를 단위로 한다는 의미로 political을 새롭게 결합한 것이다. 여기에 “정치”라는 개념은 조금도 들어가 있지 않다. 따라서 political economy를 “정치경제학”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그 맥락이나 내용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버리는 일이다. 굳이 번역한다면 “국가경제학” 정도로 번역하는 것이 조금 더 본래의 뜻에 가까울 수 있다.

사진그림1.
애덤 스미스가 만들어낸 경제학 최초의 명칭 political economy를
처음으로 사용한 데이비드 리카도의 저작(1817년) 

그런데 이런 혼란에 또 하나의 어려움이 중첩되어 있다. 바로 economics라는 용어이다. 국내에서 “경제학”으로 번역하고 있는 이 용어는 원래 1890년 영국의 경제학자 앨프리드 마셜이 자신의 저작에서 처음 만들어 사용한 것이다. 그는 애덤 스미스 이후 기존의 학문 체계 가운데 일부(가치론이라고 부르는 부분이다)를 수정하고 그것을 기존의 political economy와 구별하기 위해 economics라는 호칭을 새롭게 끌어다 사용하였다. 즉 economics는 political economy에서 파생되어 나온 하나의 이론에 대해 붙여진 명칭에 불과한 것이다.

사진그림2.
economics를 처음으로 사용한 앨프리드 마셜의 저작(1890년)

그렇다면 이제 문제는 political economy와 economics를 각기 구별하여 “정치경제학”, “경제학”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맞는가 하는 것이다. 이들 두 용어는 모두 경제를 다루는 동일한 학문을 가리키고, 그 학문의 명칭은 내내 political economy로 사용되어 오다가 1890년 마셜이 혼자 예외적으로 economics를 주장했을 뿐이다. 마셜이 수정한 이론에 동의한 학자들은 통칭 신고전파로 불리는데 이들 가운데 제본스, 멩거, 발라 등의 다른 학자들은 아무도 economics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고 모두 political economy를 그대로 사용했다.
애덤 스미스가 처음 정의했듯이 “국민과 국가를 모두 부유하게 만들고자 하는 학문”을 무엇으로 부를 것인지의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political economy와 economics를 서로 다른 명칭으로 부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여기에 또 한 가지 문제가 추가된다. 프랑스와 독일에는 economics라는 용어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프랑스에서는 이 학문을 économie politique로, 독일에서는 Volkswirtschaftswissenschaft, 혹은 Politische Ökonomie로만 부른다. 만일 economics만을 “경제학”으로 번역하고 다른 용어는 다른 말로 번역한다면 이들 두 나라에는 “경제학”으로 번역될 학문이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애덤 스미스가 정의한 학문을 이미 “경제학”으로 번역해서 사용하고 있다. 그를 흔히 경제학의 아버지로 부르는 것이 바로 그 증거이다. 하지만 economics는 1890년에야 비로소 처음 나타난 용어이고 애덤 스미스가 살던 시기에는 당연히 존재하지 않았다. economics만을 경제학으로 부를 수 없는 이유이다. 요컨대 경제학은 영국에서 처음 만들어져 세계 각국으로 보급된 학문으로, 그 명칭은 시기별로, 그리고 각 나라별로 제각기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던 것이다. 이들 다양한 명칭은 모두 동일한 학문을 가리키는 것인 만큼 하나의 용어, 즉 “경제학”으로 통일해서 부르는 것이 당연하다.
사실 이 문제는 동양에서 가장 먼저 마르크스를 번역했던 일본에서 이미 겪었던 문제이기도 하다. 일본에서도 political economy와 economics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지를 둘러싸고 고민이 있었고 학자들마다 제각기 “정치경제학”이나 “경제학”으로 번역하면서 혼선을 빚다가 1998년 나고야 대학의 다케모토 히로시 교수가 이 문제를 논리적으로 정리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적어도 일본의 마르크스 경제학자들은 political economy를 모두 “경제학”으로 통일해서 부르고 있다. 그래서 <자본>의 부제목도 “경제학 비판”으로 붙여져 있다. 

사진그림3.
일본에서 출판된 <자본론> 번역본,
부제목으로 “경제학 비판”이 붙어 있다.

이 문제에 숨겨져 있는 또 하나의 문제는 통역과 번역의 차이에 관한 것이다. political economy를 “정치경제학”으로 번역하는 사람들은 모두 “political”이라는 말의 형태에 집착한다. 그것이 “정치적”으로 번역되는 단어라는 것이다. 이것은 외국어를 “형태” 그대로 옮기는 것, 대개 직역이라고도 부르는 것으로 통역의 경우에 해당한다. 그러나 번역은 통역과 달리 외국어에 담긴 “내용”을 전달하는 것이 핵심이다. political economy의 번역은 바로 통역과 번역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부연하자면 독일에서 이 학문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는 Volkswirtschaftswissenschaft도 “국민경제학”이 아니라 그냥 “경제학”으로 번역해야 맞다. 이 용어 역시 경제학의 다양한 명칭 가운데 하나일 뿐이기 때문이다.

저자

강신준(교수, 연구소장)

  • 동아대학교 경제학과 특임교수, 맑스엥겔스 연구소장
  • 저서: <자본의 이해>, <오늘 자본을 읽다>, <마르크스의 자본, 판도라의 상자를 열다>
    역서: <자본>1~3(카를 마르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