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기

[2022 공모전 당선작] 으뜸상 - 언어, 정책 지원의 진정한 시작

  • 등록자: 김경준
  • 등록일: 2022.11.07
  • 조회수: 570

언어, 정책 지원의 진정한 시작

김경준(으뜸상)


 창업처럼 정보 비대칭이 심한 분야는 없을 것이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창업에 대한 전반적 지식이 부족하여 어려움을 겪는다. 기업을 설립하고 운영하는 데 가치 있고 유용한 정보는 성공한 기업가나 실력 있는 투자자들에게서 얻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러한 정보는 개인적 인맥으로 소수에게만 알음알음 공유된다. 창업 관련 지식에 접근할 수 있는 용이성 자체가 떨어지는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는 창업 실패 후 감수해야 할 위험 수준이 다른 국가들보다 유독 높은 편이다. 2021년 대한상공회의소가 발표한 '역동적 창업생태계 조성을 위한 정책제언' 보고서를 보면 창업 후 5년이 되면 3분의 2 이상의 기업이 폐업하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성공보다는 실패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높지만, 이를 고려하지 않은 채 사업을 포기한 이들을 ‘인생의 패배자’로 낙인찍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창업에 우호적이지 않은 문화이기 때문에, 정부 기관의 중요성이 대두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공적 영역에 상당 부분 의존하며 조심스럽게 창업을 향해 한 발짝 내딛는다.


 나는 벤처기업과 관련된 공공기관에서 근무하고 있어서 초기 창업자들에게 많은 문의 전화를 받곤 한다. 수화기 너머 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그들의 답답함과 막막함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나는 벤처기업 투자 기금 관련 업무를 수행하기 때문에, 엄밀하게 말하면 창업자들을 직접 지원하는 영역과는 거리가 먼 일을 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들의 힘든 사연을 듣고 “저희 기관 소관 업무가 아니니까 다른 곳에 전화해 보세요.”라는 기계적인 말이 차마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들이 어려운 상황을 타개하는 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기 위해서 여러 방법을 찾아보던 중에, 창업 지원 정보가 집대성된 ‘K-Startup(케이-스타트업) 창업지원포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후 나는 이러한 전화를 받으면 이곳에 가 보라고 추천했다. 

 우리 기관이 주관하는 누리집이 아니므로 어떤 내용이 게시되었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중소벤처기업부에서 창업자들이 창업 지원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도록 고안한 창구라서, 내게 문의한 분들에게 도움이 되겠다는 낙관적 기대감으로 추천한 것뿐이었다. 내가 권유한 곳인데 그 내용을 잘 모른다는 것은 책임 유기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 누리집에 들어가 어떤 게시물이 올라와 있는지 찬찬히 살펴봤고, 충격에 휩싸였다.


 제목은 거의 다 외국어로 도배되어 있었고, 벤처업계에 종사하는 나마저도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사업 명칭이 꽤 있었다. 그중 두 가지 사례를 언급하고자 한다. 첫 번째는 ‘TIPS(팁스)’라는 사업이다. TIPS는 ‘Tech Incubator Program for Startup(테크 인큐베이터 프로그램 포 스타트업)’의 약자다. 민간기관의 투자뿐만 아니라 정부 지원금과 입주 공간, 상담 및 지도 등 여러 형태로 지원받을 수 있는 좋은 제도이기 때문에, 벤처기업들이 참여할 만한 요소가 충분하다. 

 그런데 영어 표현인 데다가 로마자로 축약된 형태여서 사업 명칭을 보고 그 의미를 유추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이러한 지원이 필요한 기업인들이 분명 많이 있을 텐데 만일 상세 설명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명칭만 본다면, 자신과 관련 없는 정책인 줄 알고 넘겨버릴 가능성이 크다. 만일, ‘민간투자주도형 기술창업지원’이라는 우리말 표현을 전면에 내세운다면 이러한 확률을 줄일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사용자 편의성을 고려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쉬운 사례였다.


 두 번째는 ‘액셀러레이팅’이라는 용어였다. 정책 수혜의 대상이 폭넓어 금융, 교육, 제조업 등 다양한 산업의 창업 지원에 통용되는 단어였기 때문에 주목해서 볼 수밖에 없었다. 액셀러레이팅은 투자 유치·연계에 대한 전문성을 보유할 뿐만 아니라, 직접 투자까지 집행하는 ‘액셀러레이터’가 주체가 된 사업이기 때문에 이 용어가 탄생한 것이었다. 

 사실, 액셀러레이터는 ‘창업 기획자’라는 우리말로 쓸 수 있다. 그러나 창업 기획자라는 단어를 먼저 표기한 경우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누군가는 ‘그저 영어 하나 쓰는 것이 무슨 대수냐.’라고 이 문제를 민감하게 생각하지 않은 채 퉁명스럽게 대응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액셀러레이터를 사용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액셀러레이팅이라는 단어가 만들어지는 것처럼, 영단어 하나로 그치지 않는 것이 문제다. 지속해서 다른 영단어가 파생함으로써, 무분별한 외국어 남용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를 경계하고 피해야 한다. 그리고 ‘창업 기획자’라는 단어가 ‘액셀러레이터’보다 이들의 정체성을 더 잘 나타낸다. 우리는 창업 기획자라는 단어를 듣고 ‘이들은 창업 초기 기업을 발굴하고, 전반적 방향을 기획하며, 성장을 지원하는 전문가 집단이다.’라고 쉽게 정의 내릴 수 있다. 우리말을 지킬 수 있고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우리말 표현이 실보다 득이 훨씬 크다는 걸 깨닫게 된 계기였다. 


 나는 업무 특성상 창업 생태계 구성원들, 이를테면 벤처 투자자 및 정부 부처 사람들과 많은 대화를 주고받는다. 이들의 언어 대부분은 알아듣기 힘든 외국어다. 처음에는 단어의 뜻을 이해하지 못해 의사소통이 제대로 안 될 정도였다. 물론 시간이 지나고 경험과 지식이 쌓이면서 이러한 어려움이 차차 줄어들긴 했다. 그러나 처음 창업을 시작하는 이들에게는 지적 허영심이 가득한, 외국어 범벅인 정책을 대하며 언어가 큰 장벽이 되겠다는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어떤 이는 우리나라 벤처 생태계가 창업 선진국인 미국에서 상당 부분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현상 아니냐고 반박할 수 있다. 어찌 보면 타당해 보이지만 이러한 관용을 공공 영역에까지 확대하여 적용할 수는 없다. 우리나라 창업 관련 정책들은 미국 제도를 차용하는 것이 많다. 그러나 미국의 대담한 창업 문화와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만 옮겨와야지, 용어까지 그대로 모방하는 것은 안일한 결정이다. 큰 고민 없이 외국어를 남용하는 것은 정책 수요자들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조치다. 창업이라고 하는 명확한 답이 없는 여정에서 어떻게든 길을 찾고자 간절한 마음으로 찾았던 곳에서 외국어로 가득한 정책들을 마주한다면 그들은 오히려 길을 잃게 될 것이다.


 정책을 세울 때 어떠한 대상에게 어느 정도 규모의 공적 자금을 투입하고, 어떠한 방식으로 혜택을 제공할 것인지 정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정책 지원의 진정한 시작은 수요자가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될 용어를 고찰하는 데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그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정책 수요자들이 불편함을 느끼지는 않을지, 이 용어가 사업 신청을 하는 데 오히려 장애 요소가 되지는 않을지를 심도 있고 세심하게 의논해야 한다. 수요자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채택할 때, 비로소 그 정책은 국민 다수의 시선에 포착될 것이다. 이것만큼 강력한 정책 홍보 방안은 없을 것이다. 지원 정책이 유명무실해지지 않고,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힘차게 도달할 수 있도록 언어에 대해 고민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