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기

[2022 공모전 당선작] 버금상 - 벽을 넘어서

  • 등록자: 김보미
  • 등록일: 2022.11.07
  • 조회수: 388

벽을 넘어서

김보미(버금상)


수감 생활은 수감자의 모든 자유를 제한한다. 먹거나 자거나 입는 것, 일하는 것 등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갇혀 있는 것 자체가 형벌인 그곳에서도 죄를 지으면 독방에 갇히는 벌을 받는다. 수감자들은 독방 생활이 가장 끔찍하다고 한다. 그러니까 수감 생활보다 더 큰 형벌은 혼자 있는 것이다.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사회적 존재다. 소통하고 반응하는 것이 인간의 일상이다. 독방에 갇힌다는 것은 고립과 고독의 바다에 뛰어드는 일이다. 아무리 신호를 보내도 구조될 수 없는 그 깊은 절망에 나 스스로 빠진 적이 있었다. 나 자신을 벽 안에 가둔 것이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팔다리가 뒤틀린 지체 장애인이다. 자라면서 사지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해 술 취한 사람이 비틀거리듯 걸었다. 길을 걸어가면 지나가는 사람 모두가 구경하듯 나를 돌아봤다. 건물 안에 들어서면 그곳이 어디든 따가운 주목을 받았다.

 온 가족의 도움으로 학교를 겨우 다녔지만, 매시간이 지옥이었다. 또래 아이들은 사지가 뒤틀린 채 비틀거리는 나를 ‘괴물’이라고 불렀다. 아이들끼리 나한테 돌 던지기, 넘어뜨리기, 밟고 지나가기 등의 놀이가 유행했고, 내 몸은 성할 날이 없었다.

 거리에 나서면 사람들의 쏘아보는 눈빛, “그 몸으로 왜 밖에 나왔냐.”라는 뾰족한 말에 매일 몸과 마음을 다쳤다. 나를 사람으로 보지 않는 또래 아이들의 괴롭힘, 세상의 차가운 반응에 나는 점점 지쳐갔다. 모두의 주목을 받은 채 뭔가 일을 처리할 때면 몸은 더 불안하게 떨렸고, 발음도 한층 어눌해졌다. 그래서 관공서에 가서 처리할 중요한 일이나, 병원 방문 같은 것들을 포기한 적도 많았다.

 나를 돌보느라 고생하는 가족들을 위해 억지로 열심히 사는 척했지만, 속으론 곪아가고 있었다. 10여 년을 그렇게 보낸 후, 성인이 되자마자 나는 나 자신을 내 방에 감금했다. 방문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자물쇠를 걸었다. 처음엔 ‘그러다 말겠지.’ 하던 가족들도 내가 반년째 두문불출하자, 힘으로 방문을 부수고 나를 데리고 나가려고 했다.

 부모님이 나를 들어 올리고, 오빠가 뒤에서 밀며 제발 거실까지라도 나가자고 사정했지만 나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손목을 문고리 안에 넣고 버티느라 팔에 상처가 생기고 나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그 후, 몇 차례 비슷한 무력 사태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나만 다치고 끝이 났다. 결국, 가족들도 나를 포기했다.


 아무하고도, 심지어 가족과도 말 한마디 섞지 않은 채 완벽한 혼자가 되자, 안도감이 몰려왔다. 마침내 혼자가 되었다. 이제 누구에게도 상처받지 않을 수 있다. 괴롭힘당하지 않을 수 있다. 혹시나 누군가와 친구가 되진 않을까 하는 헛된 기대가 무너져 절망하지 않아도 된다. 함께인 채 너무 아팠기 때문에 나는 혼자이기만 해도 편안해졌다.

 재활 치료를 하러 병원에도 가지 않았고, 유일하게 대화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 복지관에도 가지 않았다. 가족들이 있을 때는 화장실도 가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비록 벽 안에 갇힌 신세였지만 아무도 나를 볼 수 없었고, 누구도 나를 상처 입힐 수 없었다.

 그러나 내 수감 생활은 가족들에게 말할 수 없는 큰 고통이었다. 특히, 엄마가 매일 밤 방문 고리를 잡고 사정하실 정도로 괴로워하셨다. 내 치료비를 벌기 위해 힘들게 일하고 오셔서 쉬지도 못하고 밤늦도록 나를 설득하는 엄마의 피곤한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흔들렸지만 그래도 방문을 열지 않았다.


 그렇게 속절없이 시간이 흘렀을 때, 엄마가 반색하며 내 방문에 대고 말씀하셨다. 장애인 복지 정책 중에 활동 보조 제도가 있다고 했다. 거동이 불편한 장애인들이 자유롭게 외출할 수 있도록 활동 보조사 선생님들이 바깥 활동을 함께해주는 것이었다. 활동 보조 선생님이 관공서나 병원 같은 곳도 따라가 주시고, 영화나 미술관 관람 같은 문화생활도 함께해주신다고 했다.

 그러면 외출하는 내내 보호자가 있는 셈이고, 말을 하거나 뭔가를 처리하는 일도 도와주실 테니 훨씬 외출하기 편하지 않겠느냐고 엄마가 간곡히 나를 설득하셨다. 엄마랑 같이 구청에 가서 설명만이라도 들어보자고, 자세한 내용을 들어보고도 싫으면 그때는 엄마도 포기하겠다고 하셨다. 활동 보조 선생님이 나의 모든 바깥 활동을 도와준다는 말에 자꾸만 마음이 움직였다.

 나는 그럼 아주 잠깐 설명만 듣고 오기로 조건을 달고, 아주 오랜만에 엄마와 집을 나섰다. 마치 오지에서 처음 도시에 온 것처럼 모든 것이 새롭고 눈부셨다. 그러나 그 새롭고 경이로운 감정은 금세 사라졌다. 언제나처럼 사람들의 눈빛이 나를 찔러댔다. 구청 문을 열고 비틀거리며 들어서자, 모든 사람이 주목하는 것도 여전했다.

 엄마가 장애인 복지 정책을 담당하는 부서에 활동 보조 정책을 문의하자, 구청 직원이 여러 가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내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느라 식은땀을 흘리며 괴로워하자, 엄마가 내 손을 꼭 잡아주셨다.

 “활동 보조 선생님들은 이 메신저를 통해 매칭이 되고요. 도움이 필요하실 때, 메신저 가운데 있는 콜 버튼 누르시면 오토 매칭되는 시스템이라 따로 뭔가를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쪽에서 콜 받으면 리셉션도 이 메신저로 받으시게 될 거예요.”

 활동 보조 선생님이 필요할 때는 손바닥 정도 되는 크기의 기계를 사용하면 된다는 말이었다. 내가 선생님을 요청하면 기계가 자동으로 시간이 되는 활동 보조 선생님을 연결해 준다는 것을 엄마는 알아듣지 못하신 기색이었다.

 받아 적는 것조차 쉽지 않으신지 메모지에 괜히 내 이름만 썼다 지웠다 하시던 엄마는 뭔가를 질문하려다 말고 내 눈치를 보셨다. 직원이 뭔가를 더 설명하려고 했지만, 엄마는 알았다는 대답만 하시곤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엄마는 난처하고 곤란해 보였다. 꼭 누가 쫓아낸 것처럼 부끄러운 얼굴을 하고 계셨다.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쓰는 영어 단어일지 몰라도 작은 어촌 마을에서 살아오신 중년의 엄마에게는 얼른 알아들을 수 없는 복잡한 외국어였다. 나는 그 짧은 순간, 몇 개 안 되는 영어 단어가 거대한 벽이 되어 엄마를 가두는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꼭 나처럼 벽에 갇힌 엄마를 보고 있으니 답답하고 속상했다. 


 처음으로 엄마를 위해 벽을 넘고 싶어졌다. 나 자신이 아니라 엄마를 위해 용기를 냈다. 나는 엄마의 손을 이끌고 다시 구청으로 들어갔다.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목소리가 다 갈라져서 나왔다. 나는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이 떨리고 불분명한 발음으로 아까 설명해주실 때 영어 단어가 섞여 있어 알아듣기가 어려웠다고 말했다. 

 직원은 아차 하는 표정으로 우리 모녀에게 사과했다. 오후 시간이라 긴장이 풀려 편하게 말한 것 같다고 솔직하게 말하면서 진심으로 사과하는 직원을 보던 엄마는 괜찮다고 손사래를 치셨다. 직원의 태도에 엄마도 편해지신 것 같았다. 조금만 쉽게 이야기해주면 좋겠다는 엄마의 말씀에 직원이 영어 단어를 우리말로 바꾸어 다시 설명해주었다. 

 나는 엄마에게 말씀드리고 싶었다. 영어 단어를 못 알아들은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당연히 한국어로 설명했어야 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나처럼 벽 안에 갇히지 마시라고 말하고 싶었다. 엄마는 직원의 쉬운 설명을 들으며 내 뜻을 어느 정도 짐작하신 것 같았다. 

 아까와는 다르게 엄마가 적극적으로 기계 사용법을 꼼꼼하게 직원에게 물어보고, 천천히 설명해달라는 요청도 하면서 메모하셨다. 소통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시던 엄마의 달라진 모습을 보며 나도 다시 한번 의지를 다졌다.

 그렇게 함께 각자의 벽을 넘어선 우리 모녀는 사이좋게 손을 잡고 다시 세상으로 나왔다. 나는 활동 보조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외출과 사회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병원을 다니면서 재활 치료를 받고, 구직 활동에도 도움을 받아 직장까지 얻을 수 있었다.

 엄마는 그때의 곤란했던 경험을 살려 마을에 계신 연세 많으신 어른들의 관공서 볼일을 도와드리기로 했다. 엄마는 생각보다 많은 어르신이 복지 정책의 대상이 되어도 ‘바우처’와 같은 영어 단어들을 알아듣기 어려워 혜택을 포기하고 계신다며 어르신들을 돕는 일에 열정적이셨다.


 물리적인 벽만 사람을 가두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기본적인 권리를 행사할 수 없고, 다른 사람과 대화할 수 없이 고립되면 거기가 바로 독방이다. 영어 단어 몇 개가 만들어낸 보이지 않는 언어의 벽도 충분히 사람과 사람을 단절시킬 수 있다. 어쩌면 그 보이지 않는 벽이 물리적인 벽보다 더 단단하고 복잡할 수 있다.

 뭔가 안내받기를 원하거나, 정보를 찾는 사람들은 특히나 어떤 벽을 넘어서려고 용기를 내는 중일 가능성이 크다. 그동안의 괴로움과 절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벽을 넘어서려는 사람에게 우리말을 사용함으로써 힘을 보태면 어떨까. 외국어 대신 선택한 우리말이 우리를 벽 너머에서 사람들과 소통하고 함께하는 기쁨을 알려주는 다정한 이웃으로 만들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