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기

[2022 공모전 당선작] 보람상 - 우리 안의 이방인

  • 등록자: 김정숙
  • 등록일: 2022.11.07
  • 조회수: 390

우리 안의 이방인

김정숙(보람상)


얼마 전 무심히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고 있다가 제이티비시(JTBC) 뉴스 자막이 눈에 들어왔는데,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아 고개를 갸우뚱했다.

‘대우조선 경찰특공대 투입, 브레인스토밍 얘기하다.’ 

기억하기로 이런 자막이었는데, ‘경찰특공대’에 이어 ‘브레인스토밍’이 나오니까 두 단어가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고 생뚱맞게 느껴졌다. ‘브레인스토밍’이라는 단어를 보는 순간 자유연상 두뇌 그림이 떠올랐는데 그게 경찰특공대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브레인스토밍’이 정확하게 무슨 의미인지 손전화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았다. 브레인스토밍은 ‘자유롭게 의견을 얘기하는 회의 형식’이었다. 문제는 브레인스토밍의 정확한 의미를 알고 나서도 뉴스 자막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인터넷에는 브레인스토밍의 뜻풀이에 이어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 얘기했던 브레인스토밍에 대한 기사들이 이어졌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 7월 27일 국회 본회의장 대정부 질문에서 한 답변에 관한 기사였다. 행정안전부 장관이 대우조선해양 파업 현장에 경찰특공대 투입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는지에 대한 국회의원의 질의가 있었고 이에 답변하면서 브레인스토밍 단어가 나온 모양이다. 

“경찰청과 소방청이 함께 모여서 브레인스토밍 얘기를 했었다. 그래서 브레인스토밍에 대해서 발생 가능한 모든 시나리오를 상정하고 거기에 대해서 대응책을 논의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경찰특공대 얘기도 나왔다.”

경찰특공대는 테러 진압이나 총기 폭발물 사용 범죄 등에 투입되는 전문 부대라고 한다. 그런데 임금 인상을 요구하면서 농성에 들어간 대우조선 하청 노동자에 대하여 경찰특공대 투입을 검토했다니! 현장에 충돌이 일어난 것도 아닌데 노동자를 특공대를 투입해서 진압해야 하는 대상으로 보는 문제의 심각성을 국회의원이 지적하자, 장관은 ‘브레인스토밍’ 어쩌고 하면서 변명한 것이다. 

행정안전부 장관은 뭔가 전문적인 냄새를 풍기는 외국어를 사용해 답변함으로써 이 단어의 의미를 정확히 모르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수준 높은 대화를 나눴다는 걸 은연중에 과시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브레인스토밍이라는 외국어를 사용해 경찰특공대 투입이라는 위험한 시각을 적당히 가려버리는 효과도 보려 하지 않았을까.

한 가지 더 짚고 가자면, ‘브레인스토밍’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표현을 적절하게 했으면 앞뒤 문맥에 따라 대충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브레인스토밍 얘기를 했었다.’라고 하니, ‘회의를 얘기했다.’는 말이 안 되는 말을 하고 있는 셈이다. 본인도 이 단어의 의미를 정확히 몰랐거나 아니면 이마저도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까지 들었다.


요즘 텔레비전 방송을 보고 있노라면 브레인스토밍처럼 잘 알지 못하는 외국어들이 수시로 튀어나와 사람을 당황하게 한다. 와이티엔(YTN) 뉴스에서는 코로나에 관한 보도를 하면서 ‘위중증 환자 더블링’이라는 자막을 내보냈다. ‘더블링?’ 평소 사용하지 않는 말이라 바로 이해가 되지 않아 손전화로 ‘더블링’을 검색하고 나서야 내가 알고 있는 ‘더블(double)’이라는 영어 단어를 떠올릴 수 있었고, 환자가 배로 늘었다는 의미였음을 깨달았다. 평소에 잘 쓰지 않는 말인 데다가 영어 단어를 로마자로 표현하지 않고 한글로 표기하니 바로 의미가 와닿지 않는 것이다. 도슨트(EBS), 베이비부머(KBS), 오픈런(SBS), 이슈 PICK 쌤과 함께(KBS)……. 이런 이름들은 얼마든지 우리말로 바꿔 쓸 수 있는데도 공영방송에서 버젓이 사용하고 있는 것도 문제다. 음악방송 엠넷을 보다 보면 마치 우리가 영어를 공용어로 쓰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며칠 전에도 에스비에스(SBS)의 ‘좋은 아침’ 재방송을 보고 있는데, 만병의 원인이라는 내장지방에 대하여 얘기하면서 한 아나운서가, “막 헤비한 것 같고 막 팻한 것 같고....”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살쪄서 몸이 무겁고 거북한 느낌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초대 손님도 아니고 아나운서가 그런 식으로 표현하니, 도대체 방송을 진행하는 사람으로서 언어에 대한 자기 정체성이 있기나 한 것인지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익숙하지 않은 외국어를 사용하는 것은 신문도 마찬가지다. 한겨레 신문을 보고 있는데, 기사 표제어에 ‘도어스테핑’이란 단어가 보였다. 도어스테핑이 뭔지 알지 못해서 뜻을 찾아보는데, 인터넷에는 이 단어가 온통 윤석열 대통령과 관련된 기사로 연결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도어스테핑은 ‘약식 기자회견’이라는 뜻인데, “윤석열 대통령이 도어스테핑을 잠정 중단했다.”느니, “도어스테핑으로 인한 말실수로 지지율이 떨어졌다.”느니 하는 기사들이었다. 정부에서 뭔가를 발표하면서 외국어 단어를 사용하면 방송이나 신문 등 언론에서 이를 그대로 실어 나르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실 국민제안, 트래픽 어뷰징 때문에 탑10 선정 않기로”(뉴스1, 22년 8월 1일 기사)


대통령실에서, 국민들이 제안한 정책들 중 열 가지를 정하기로 했는데 트래픽 어뷰징 때문에 선정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트래픽 어뷰징’이라는 외국어를 보는 순간, ‘으악’ 하고 소리를 지르고 싶을 정도로 짜증이 났다. 정부에서부터 이런 외국어 단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고 있으니, ‘권위 있는 정부’가 아니라 ‘권위를 내세우는 정부’임에 틀림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20대 후반, 그러니까 30여 년 전 제주 토박이인 내가 처음으로 몇 달간 서울에 살게 되었을 때의 일이다. 어느 공공주차장에 갔는데, 한 아주머니가 “파킹이 안 되고 있다.”라고 말했다. 파킹? 주차한다는 말인 것 같은데, 왜 주차라는 말을 놔두고 굳이 외국어인 파킹이란 말을 쓰고 있는지 황당했다. ‘파킹’뿐만이 아니라 이런저런 외국어 단어를 마구 섞어 쓰는 서울 사람들을 보면서 분개했던 기억이 난다. 제주도 토박이가 고층 빌딩 때문이 아니라 수시로 들리는 외국어 때문에 서울에 위화감을 느꼈던 몇 달이었다.


솔직히 모르는 외국어가 나오면, 다들 아는데 나만 모르는 건 아닌가 하는 자격지심까지 슬그머니 고개를 든다. 안 그래도 젊은 사람들이 쓰는 축약어나 유행어까지 넘쳐나는 요즘이라 그래도 소통은 제대로 하고 살려고 검색하고 또 검색하는데, 방송에서 튀어나오는 외국어까지 그 뜻을 찾아봐야 할 정도가 되니 문득문득 우리나라 안에서 이방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한다. 

8월 12일 자 한겨레 신문에서, 부산시의 영어 상용 도시 추진에 한글 단체들이 철회하라며 시위를 예고하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를 읽었다. “공공기관에서 영어 사용 환경을 조성하면 정책, 사업, 공공시설 이름 등에 영어 단어를 많이 사용하게 되고 결국 영어 능력이 떨어지는 시민들은 정확한 정보를 알기 어렵게 된다.”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수시로 영어 단어의 뜻을 검색해야 하는, 영어 능력이 떨어지는 한 시민으로서 100% 공감하는 주장이다. 솔직히 영어 상용 도시 추진은 서로 모르는 언어를 사용해도 손전화 앱으로 소통할 수 있는 시대인데 여기에도 맞지 않는 노예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정부나 방송, 공공기관에서는 우리말을 보호하고 언어를 통하여 서로 연대감을 키우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일제강점기에 조선말을 말살하려는 정책에 맞서 몰래 한글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며 지켜온 우리말이 아닌가. 어렸을 때 할머니, 할아버지한테서 일본 순사들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한밤중에 이불로 창문을 막고 몰래 한글을 배웠다는 말을 들었다. 언어와 문자가 민족혼을 묶어주는 동아줄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교육을 많이 받았든 적게 받았든, 나이가 많든 적든 간에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우리말로 공공의 언어를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