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기

[2022 공모전 당선작] 북돋움상 - 나는 대한민국의 안내원이다!

  • 등록자: 남윤숙
  • 등록일: 2022.11.07
  • 조회수: 359

나는 대한민국의 안내원이다!

남윤숙(북돋움상)


“버스킹요? 아니 교통수단인 버스와 왕이 섞인 것 외국어 같은데, 대체 이게 뭔 해괴한 말이래요? 그냥 우리말로 쉽게 거리공연이라 하면 더 좋지 않을까요?”

지난 휴가 때 우연히 어떤 무명 가수가 버스킹 하는 걸 구경했다고 말하자, 그녀는 득달같이 나를 나무랐다. 그러고 보니 진짜 의미도 모른 채 막 써댄 것이었다. 문득, 우리 손녀가 만일 내게 “할머니, 왜 버스킹이라고 하는 거예요?”라고 물어온다면, 그땐 과연 뭐라 대답해주어야 하나 싶어 아찔하기까지 했다.


그녀는 작가다. 온갖 문학 공모전마다 입상해 적어도 대한민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당선 이력을 가진 이다. 

그녀를 처음으로 본 것은 올 초 모 가수의 팬카페에서였다. 여기서 우연히 보게 된 그녀의 글, 대번에 글 실력이 범상치 않음을 느꼈다. 역시 그녀가 카페에 글을 올릴 때마다 사람들이 대부분 환호했다. 그렇다고 마치 칼럼을 쓰듯 논문을 쓰듯 정교한 글은 아니었고, 그야말로 유머러스한 문장 일색인 데다가 부산에 사는 사람이라 그런지 경상도 사투리를 있는 그대로 너무나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이렇게 윤색하지 않은 솔직한 글이라 사실 이러한 점이 더욱 사람들을 끌어당겼다. 그러다 또 어떤 날은 완전히 딴사람인 양 정색하고 글을 썼고, 그런 글엔 결코 토씨 하나 맞춤법에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 

그녀의 직업이 글을 쓰는 전업 작가란 건 나중에서야 알았다. 다들 당연하다는 듯 ‘그럼 그렇지.’ 했다.


75 평생 어쩌다 연예인 팬카페에 가입하긴 했지만, 도통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 일색이었다. ‘스밍, 마셀, 네티, 쿠플, 덕애드’ 등등. 전부 외국어인 건 알겠는데 그나마도 줄여 표기해버리니 당최 정신마저 혼미할 지경이었다. 이런 마당에 컴퓨터로든 휴대전화기로든 이리저리 그 복잡하고 어려운 응원 방법까지 또 어찌 따라 하겠는가. 

차라리 탈퇴를 해버릴까 하던 즈음 나와 비슷한 시기에 가입한 그녀의 글을 보게 되었고, 나는 그만 그녀가 올리는 글에 푹 빠지게 된 것이었다. 좋아해서 가입한 가수보다 오히려 더.


그러던 어느 날, 카페에서 소란이 일었고 속이 시끄러웠던지 그녀도 사라졌다. 그녀의 글이 보이지 않게 되자 차츰 나뿐 아니라 아주 많은 사람이 그녀의 글을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하여 우린 합심한 듯 그녀의 블로그로 찾아들어 갔다. 

아, 말로만 듣던 그녀의 멋진 수상 작품들과 꾸밈없고 진솔한 일상 글들, 정말 궁금했다. 이 작가님은 대체 어느 대학교 국문과를 나왔는지 또는 어떤 문학 쪽 석사학위를 받았는지.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작가님의 블로그에 들어갔다.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린 자연스럽게 작가님 글 밑에다 댓글을 주고받으며 즐거워했다. 그리고 다시 어느 날 깜짝 놀라 기절할 만한 내용의 글이 올라왔다. 제목은 ‘나는 대한민국의 국졸이다.’였다.


사실인즉, 작가님의 최종 학력은 국졸이라 했다. 대학은커녕 고등학교는커녕 중학교 2학년 시절 비행 청소년이 되어 퇴학을 당했기에 졸업장이라곤 단 하나 초등학교 졸업장밖에 없다고 했다. 물론 그 후 검정고시를 본 일도 없고, 그 어떠한 학업도 이어가지 않았다고 했다. 

우린 모두 아연실색했다. ‘국졸이라며? 중학교도 못 나왔다며? 그런데 어떻게 이토록 국어에 능할 수 있지? 어찌 이리 훌륭한 문학작품을 쓸 수 있으며 무엇보다 어떻게 내로라 하는 작가가 될 수 있었지?’ 아무리 책을 많이 읽었다 해도, 또 뛰어난 두뇌를 가졌다 해도,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아니 믿을 수 없었다. 이뿐 아니라 영어, 한문까지 오직 독학으로 능하게 된 것에는 기가 막혀 혀를 내둘렀다.

나는 과거 34년간이나 남자고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던 교사였다. 하지만 한글맞춤법은 늘 헷갈리고, 아니 아예 모르는 단어들로 넘친다. 작가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니 나 자신이 점점 한심해졌다. 


작가님은 블로그에다 매일 아침 ‘틀린 말 바른말’을 올려주고 있다. 잘못된 외래어 표기도 포함된다. 며칠 전에는 흔히들 ‘플랭카드, 플랑카드’라고 하는데, 바른 외래어 표기로는 플래카드가 맞는다고 했다. 더불어 이왕이면 플래카드 대신 현수막이라 하는 게 좋지 않겠냐고도 했다. 그리고 어제는 ‘숍(shop)’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우리가 늘 보고 사는 길거리 간판의 문제점을 지적한 거였다. 


-헤어샾, 네일샾, 애견샵, 할인샵... 이 모두 잘못된 표기입니다. 올바른 외래어 표기는 ‘숍’입니다. 가능한 우리말로 쓰면 더 좋겠지만, 부득이 외래어를 쓸 경우엔 바르게 표기해야겠지요.-


그러자 댓글의 90%가 ‘숍’이 올바른 표기란 걸 처음 알았다고 했다. 이어 각자 외국어 때문에 벌어진 웃지 못할 일화들을 댓글로 달기 시작했다.


“저는 컨트롤타워를 컨디션파워라고 했던 적 있어요.”

“저는 라미네이트 하러 치과에 가선 마리네이드(밑간) 해 달라고 했었어요.”

“말도 마요. 전 스케일이라 한다는 게 스타일이라 했고, 스트롱을 판타롱이라 했답니다.”

“아, 전 말이죠. 리미티드 에디션을 레이어드 에디션이라 말했지 뭐예요.”


다들 웃음보가 터졌는데 마지막 댓글이 확실하게 대미를 장식했다.


“저보다는 다들 낫네요. 전 가방 사러 백화점에 갔는데 시그니처 대신 시니어처, 시니어처 떠들어댔어요. 저를 보는 점원의 표정이....”


무분별한 외국어 사용이 불러온 폐해를 똑똑히 보게 된 순간이었다. 이에 작가님은 앞으로 블로그에서만이라도 가능한 외국어를 금지하자고 부탁했다.


여전히 팬카페에선 응원 용어로 ‘스밍, 마셀, 네티, 쿠플, 덕애드’를 외쳐대며 난리다. 나처럼 나이 많은 사람 몇은 어쩌면, 눈과 귀가 어지럽고 젊은 사람들을 따라가려니 가랑이까지 찢어질 거 같아 탈퇴해버릴 지도 모른다. 

작가님이 운영하는 이 블로그가 팬카페보다 훨씬 좋다. 마치 내가 초등학교 1학년에 이제 막 입학해 ‘가나다라’부터 배우는 학생 같고, 바른 우리말과 잘못 쓰는 외국어를 깨우칠 때마다 또 희한하게 가슴에선 애국심마저 생긴다. 


현재 나는, 지난 역사 교사 이력을 살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해설 자원봉사자로 일하는 중이다. 처음엔 내가 나를 소개할 때 ‘도슨트(docent)’라고 했다. 입에는 잘 붙지 않았지만 이 말이 왠지 고급스럽고 멋지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도슨트’란 말을 나 스스로 쓰지 않는다. 작가님 말씀이 백번 맞다. 역사 교사였던 사람이, 그리고 적어도 우리나라 역사를 알려주는 사람으로서 안내원이란 말을 멀쩡히 두고 도슨트라니.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저는 국립중앙박물관 안내원 남윤숙이라고 합니다.”

나도 그녀처럼 우리말을 사랑하는 멋진 안내원이 될 거라 새롭게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