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기

[2021 공모전 당선작] 버금상 - 아버지를 간병하며, 우리말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 등록자: 정현환
  • 등록일: 2021.12.29
  • 조회수: 931

아버지를 간병하며, 우리말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정현환(버금상)


“아들, 로드 맵이 뭐야?”


소세포성 폐암이라는 희소암을 앓으셨던 아버지를 2년 7개월 동안 간병했다. 집에 간병인이 꼭 필요했는데 어머니와 동생을 대신해 그 역할을 자처했다. 아버지를 돌보며 동시에 생계를 꾸릴 수 있는 일도 찾았다. 밖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재택근무를 할 수 있는 어느 방송국의 시청자 모니터 위원 활동을 알게 되어 4년 4개월 동안 일했다. 하루에 4시간씩 주말과 평일, 휴일과 명절을 가리지 않고 매일 뉴스에서 나오는 우리말과 글을 확인했다. 


오전 4시 30분, 앞을 보는 게 점점 불편해지는 아버지와 티비로 뉴스를 볼 때였다. 정치 소식에서 남성 앵커가 “개헌 로드 맵 제시해야”라고 말했다. 40초 남짓한 단신 뉴스가 끝나고 곧바로 아버지께서 “아들, 로드 맵이 뭐야?”라고 물었다. 영상을 보면 로드 맵이 ‘이행안’이라는 점을 쉽게 유추할 수 있었는데, 뉴스에서 별다른 설명 없이 단순히 “로드 맵”이라고만 말하니, 항암 치료 후유증으로 시력 장애가 있던 아버지는 뉴스를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로드 맵’은 ‘이행안’을 말하는 외국어야”


평소 맞춤법이 헷갈리거나 모르는 단어를 보게 되면, 국립국어원 누리집에 들어가 검색한다. 그 덕분이었을까. 아버지의 물음에 곧바로 로드 맵의 의미를 설명할 수 있었다. 귀에만 의존해 뉴스를 듣던 아버지가 “왜 우리말을 내버려 두고 다른 나라 말을 써”라고 읊조렸다. 그러고 보니 그랬다. 우리말 사용에 앞장서야 할 공공재인 방송에서 무슨 이유로 우리말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는지, 외국어를 이렇게 써도 무방한지, 그 배경을 잘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새벽 4시 30분 뉴스는 4시 59분 단신으로, 다시 5시 58분과 6시 58분, 7시 50분으로 이어졌다. 편성표에 따라 하루에 똑같은 뉴스가 여러 차례 방송됐는데, 그만큼 외국어가 흘러 나왔다. 뉴스에서 우리말과 한글을 사용하는 게 시청자 입장에서 훨씬 더 이해하기 쉬울 수 있음에도, 이른 아침의 상황은 멈추지 않고 밤낮으로 되풀이됐다. 외국어가 남용되는 상황은 한 달 뒤에도 비슷했고, 10개월이 지난 뒤에도, 4년 뒤에도 다른 뉴스에서 되풀이됐다. 


단지 앵커의 성별과 이름, 시간대만 다를 뿐, 외국어가 우리말을 밀어내는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매일 뉴스를 설명하며 외국어를 우리말로 풀이해 드렸다. 승객 안전사고 뉴스에 나온 ‘스크린 도어’는 ‘안전문’으로, 스포츠 뉴스에 나온 ‘리턴 매치’는 ‘재대결’이라고 알려드렸다. 방송 길이의 한계, 뉴스 하단 자막이라는 공간적 제약을 고려하면 다섯 글자인 외국어보다 세 글자인 우리말이 더 경제적이었음에도 뉴스에서는 외국어를 사용했다. 누워 계신 아버지에게 우리말을 사용해도 내용을 이해하는 데 전혀 지장이 없는데, 굳이 외국어를 사용하는 실태도 말씀해 드렸다.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 제52조에서는 “방송은 외국어를 사용하는 경우 국어순화 차원에서 신중하여야 한다.”라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우리 방송과 뉴스에서 앵커와 기자, 자막이 보여주는 모습은 이 규정과는 동떨어져 있다. 국립국어원에서는 새말 모임을 만들어 외국어 사용을 줄이려 순화어를 내놓고 있는데, 방송 뉴스에서 불필요하게 외국어를 씀으로써 이러한 과정과 노력을 무색하게 만들고 있었다. 나는 이 규정과 노력을 참고하여 2017년 2회, 2018년 27회, 2019년 12회, 2020년 28회에 걸쳐 뉴스에서 우리말을 잘 사용하지 않은 점을 비판하며, 방송국에 보고서를 제출했다. 


사람이 아파서 움직이기가 힘들면 저절로 세상과 단절된다. 암 후유증을 겪는 아버지를 돌보던 2년 7개월이라는 모든 순간과 공간이 그러했다. 바깥보다 집 안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세상과 아버지를 어떻게든 연결하려는 내 시간도 그만큼 늘어났다. 아버지가 아프다는 이유로 소외되지 않게 세상 소식을 알려드리고 싶어 방송 뉴스를 같이 보며 읽어드렸다. 뉴스에 외국어가 나올 때마다, 국립국어원 순화어 목록을 참고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에게 뉴스를 읽어드리며 싱크홀은 ‘땅꺼짐’, 포트 홀은 ‘도로 파임’이라고 알려드렸다. 블랙 아이스는 ‘도로 살얼음’이라는 뜻이며, 앞으로 아버지가 건강을 회복하면 함께 달릴 길에서 내가 조심해야 될 내용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코너에 몰린 한진家”라는 자막보다 “구석에 몰린 한진가(家)”라고 쓰는 게 의미가 더 분명해 이해하기 쉽다고 설명했다. 어느 날 “우리 아들 많이 아네.”라는 아버지의 말에 속으로 기뻤지만 겉으로는 티 내지 않으며, 무심하게 뉴스를 봤다.


그렇게 아버지를 약 3년 동안 간병하고 뉴스를 읽어드리며 알게 됐다. 나 스스로 그동안 무심코 받아들였던 외국어가 너무 많았으며, 또 지금 방송 환경에서 우리말이 지나치게 소홀히 다뤄지고 있다. 외국어 남용의 심각성을 확인하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도 1년 9개월 더 시청자 모니터 위원을 하며, 총 69회에 걸쳐 외국어 오남용 실태를 꼬집었다.


그 진심이 통했을까. 어느 날 방송국 작가에게서 연락이 왔다. 내가 평소 소셜미디어에 우리말 사용의 중요성과 고민을 남긴 글을 보고, 방송에 출연해 달라고 온 섭외 전화였다. 시청자의 한 사람으로 정치, 경제, 사회 등의 뉴스에서 외국어를 남용하는 실태를 지적하며, 예능 자막에서 우리말과 한글이 파괴되는 현상을 어떻게 보는지 말해 달라는 취지였다. 그렇게 2020년에 방송이 됐다. 누군가에게는 2분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일지 모르겠으나, 나에겐 그동안의 노력을 보상받는 값진 시간이었다. 


“알고 짓는 죄와 모르고 짓는 죄 중에 무엇이 더 큰가?”


불교 경전 가운데 <나선비구경>이라고 불리는 <밀린다왕문경>에 나오는 말이다. 이 질문을 받은 나가세나 존자는 “달궈진 쇠구슬을 알고 잡는 이와 모르고 잡는 이 중에 누가 더 크게 다치겠는가. 모르고 잡은 이가 더 크게 다친다. 모르고 짓는 죄는 이와 같이 과가 더 크다.”라고 대답했다. 


아버지를 간병하고 뉴스를 직접 읽어드리며 우리말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밀린다왕문경>의 문답을 본 뒤부터는 그 의미를 틈틈이 곱씹고 있다. 그동안 나 자신이 우리말을 너무 몰랐고, 제대로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래서일까. 지금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시청자 모니터 위원 활동도 끝났지만, 일상생활에서 우연히 외국어를 볼 때마다 국립국어원 ‘온라인가나다’ 게시판을 찾는다.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 우연히 느낀 우리말의 소중함을 잊고 싶지 않아 오늘도 혹시 새롭게 나온 순화어가 있는지 확인한다. 우리말은 이제 나에게 생활이자 습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