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기

[2021 공모전 당선작] 북돋움상 -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 등록자: 박선영
  • 등록일: 2021.12.29
  • 조회수: 976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박선영(북돋움상)


 온 가족이 모처럼 모여서 식사하고, 텔레비전 시사 프로그램을 보며 과일을 먹을 때였다. 

  “기후 위기가 정치적 마타도어로 악용돼선 안 된다.”라는 말이 들리자, 우리 가족은 모두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하는 것처럼 일순간 얼음이 되어 모든 동작을 멈추고 눈만 끔뻑였다.

  “언니,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무슨 도어??”

  “마타도어래. 근데 그건 무슨 문이야? 서울에 있는 문인가?”

  “딸~! 딸은 선생님이니까 잘 알겠지. 그래, 마타도어가 무슨 뜻이니?”

 순간 모든 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쏠렸고 사과를 베어 물던 나는 당황스러움에 켁켁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선생님이니 모든 것을 다 알 것 이라고 기대하는 식구들의 눈을 보니, “몰라! 나도 처음 듣는 말이야.”라고 이실직고하기가 멋쩍었다.

  “켁켁, 잠깐만 물, 물 좀 마시고!” 나는 능청스럽게 말하며, 스마트폰을 가지고 부엌으로 갔고, 재빨리 ‘마타도어’라는 단어를 검색해 보았다.

 마타도어는 스페인의 투우장에서 마지막에 소의 정수리를 찔러 죽이는 투우사를 뜻하는 스페인어 마타도르(Matador)에서 유래한 말로, 쉬운 우리말로 순화하면 ‘흑색선전’으로 쓸 수 있다고 한다. 재빨리 검색을 마친 나는 자연스럽게 거실로 돌아와 순간적으로 익힌 단어의 유래를 원래 알고 있던 것마냥 식구들에게 설명해 주었고, “역시 선생님은 달라. 스페인어 유래도 알고. 언니 최고다.”라는 칭찬을 들었다. 난 그때 멋쩍고 창피해서 잘 익은 사과처럼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이때만큼 칭찬이 불편한 가시처럼 따끔거렸던 적이 없다. 

  

 최근 대선을 앞두고 우리말 사용에 앞장서야 할 정치권에서 여기저기 국적 모를 어려운 단어들을 남발하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하고 안타깝다. 

 세계적으로 뛰어난 우리 아름다운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이나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라고 염원했던 김구가, 공공 기관의 외국어 남발이나 예능 프로그램에서 정체불명의 외국어를 남용하는 것을 보았다면 얼마나 한탄할지, 죄송스러울 따름이다.

 총, 칼을 들이대며 소중한 우리말과 글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억압하고 통제하던 때가 있었다. 우리가 어떻게 지켜온 한글인데, 비단 언론이나 공공 기관뿐만 아니라, 우리 일상생활에서도 어려운 외국 낱말 때문에 불편했던 경우가 너무도 많지 않은가?

  

 학교에서 과학 2단원 생물과 환경 시간에 동기 유발을 위해 동영상 자료를 하나 시청했다. “환경 보호를 위해 제로 웨이스트(zero waste)를 실천하자.”라는 기자의 말이 끝나자, 우리 반 발표 대장 석현이가 손을 번쩍 들었다. “선생님! 제로 웨이스트가 뭐예요?” 마치 가려운 데를 알아서 긁어주듯, 자신도 몰랐던 단어를 친구가 대신 질문해줘서 고맙다는 듯이 아이들은 대부분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 제로 웨이스트란 포장을 줄이거나 재활용할 수 있는 재료를 사용해서 쓰레기를 줄이려는 세계적인 움직임이란다.” 

  “뭐야~ 그냥 있어 보이려고 어려운 말 쓴 거네요. 쉽고 간단히 말해서 쓰레기 줄이기란 말이죠?”

  “우리 반은 역시 똑똑해! 맞아요. 그럼 이 시간엔 쓰레기를 줄이는 최고의 방법을 토의해 보자.”

  “네! 제로 웨이스트라는 영어 대신, 쓰레기 줄이기라고 하니까 더 쉽게 느껴져요. 우리말이 더 좋아요!”


 수업이 끝난 뒤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일상생활에 외국 낱말이 얼마나 깊숙이 침투해 있는지를……. 

 어려운 낱말이 아니란 이유로, 너무 자주 쓰고 보아서 외국어인지도 모르고 사용하는 단어를 하나하나 따져보면 얼마나 많을까? ‘제로’와 ‘웨이스트’라는 단어를 모르는 어린 아이나 어르신들은 ‘제로 웨이스트’라는 단어를 접했을 때 무슨 뜻일지 몰라 얼마나 답답하게 느껴졌을까?

  “우리말을 아끼고 사랑하자”라고 백번 말하는 것보다, 외국어를 몰라 답답했던 경험을 아이들이 실제로 겪자, 누가 시키지 않아도 쉽고 편한 우리말에 고마움을 스스로 깨닫는 것 같아 흐뭇했다. 

 학교에서만이라도, 나부터라도 아름다운 우리말을 바르게 사용하기 위해 더 신경 써서 지도해야겠다고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다.


 공공 언어에서 외국어 사용을 줄이기 위해 용어를 개선하고 우리말로 순화하려는 노력이 지속되고 있지만 효과는 기대에 못 미친다고 생각한다. 매일 우리가 보고 듣는 매체에서, 아이들이 즐겨보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길거리 간판에서, 쉬운 우리말보다 정체불명의 외국어가 더 눈에 많이 띄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그룹 BTS와, 영화 기생충, 한국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열풍으로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한글을 향한 관심이 뜨겁다고 한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이런 기사를 접할 때마다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낀다. 이렇게 한글 사랑이 뜨거운 이때,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자발적인 한글 홍보 대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의 아름다운 말과 글이 전 세계 방방곡곡에서 아름답게 울려 퍼지면 좋겠다. 다시한번 김구 선생님의 말씀을 떠올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