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기

[2021 공모전 당선작] 북돋움상 - 네거티브? 네이티브?

  • 등록자: 장미자
  • 등록일: 2021.12.29
  • 조회수: 915

네거티브? 네이티브?

장미자(북돋움상)


옆집엔 80세 할머니가 사신다. 나는 이 집에서 10년을 살았고, 할머니는 6년 전 이사를 오셨다. 반찬도 해다 드리고, 뭔가 고장이 났다며 할머니가 나를 호출하면 즉각 달려가 해결해드리고, 아무튼 할머니와 나는 그간 꽤 허물없이 지내왔다. 그리고 옆집 할머니 댁에는 친구 분들이 매일 오가시는데 그 할머니들 역시 나와 아주 친하다.


 내년에는 대통령 선거가 열린다. 그래서인지 벌써 몇 달 전부터 옆집 할머니들의 이야깃거리는 단연 선거와 관련된 것들이다. TV 뉴스를 보시며 어떤 후보자에게는 칭찬의 말을 아끼지 않고, 또 다른 후보에게는 그야말로 육두문자를 서슴없이 퍼부어댄다. 그러다 할머니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나오면 앞다투어 내게 물어보신다. “야야, 저게 지금 머라카는 기고?”, “야야, 뭐라 말하는 건지 당최 알아 묵을 수가 없다. 니야 젊으니까 알제?”

 나는 할아버지들이나 정치에 관심이 많은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할머니들도 이토록 대한민국 정치에 대단한 관심을 보이고 계셨다.


 그러던 며칠 전, 감자전을 만들어 옆집으로 들고 가니 아니나 다를까 할머니 세 분이 계셨다. 귀청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소리를 높여 놓은 TV에서는 영락없이 내년에 치러질 대통령 선거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시선은 TV 뉴스에 고정한 채 감자전에 반색하며 손으로 덥석 뜯어 드시던 할머니들, 그런데 어떤 기자의 보도에 귀를 쫑긋하시더니 서로들 말씀하셨다.

 “내가 뭐라카노?”

 “내가 티비라카나?”

 “저기 뭔 말이고?”

 그러시며 일제히 나를 쳐다보셨다. 이는 저 기자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게 무슨 뜻인지 나더러 빨리 알려달란 신호다. 

 

 기자는 네거티브라 했다. 네거티브는, 선거 운동 과정에서 상대방에게 ‘기면 기고 아니면 그만이다’라는 식으로 마구잡이로 하는 음해성 발언이나 행동을 일컫는 말이다.

 나는 네거티브의 뜻을 물론 알고 있다. 그러나 이걸 할머니들께 어찌 설명해주어야 하나 난감했다. 정말 한 번에 딱 알아들으시도록 쉽게 말씀드려야 하는데 어쩌지? 잠시 망설이던 나는 할머니들께 말했다.

 “저건 영어인데요, 선거 운동을 시끄럽고 지저분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했더니 할머니들은 일제히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리곤 서로 왁자지껄 말씀하셨다.

 “그래? 그냥 알아듣기 쉽구로 한글로 씨부리면 되지 뭐 내...내가 티버?”

 “쉬운 우리말 다 놔두고 와 꼬부랑말을 쓰는지 모르겠다.”

 “젊은 사람들이야 알아듣겠지만 우리 같이 나이 묵은 노인네들은 갈수록 빙신되는 기라.”


 할머니들이 감자전을 다 드시자 들고 갔던 쟁반을 들고 다시 집으로 왔다. 그런데 계속 네거티브, 네거티브. 이 네거티브란 단어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내가 과연 할머니들께 제대로 설명을 해 드린 건가 싶기도 하고, 나 역시 쉬운 말 다 놔두고 왜 꼭 외국어를 사용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마구 밀려들었다. 그렇다면 네거티브를 우리말로 어찌 바꾼다? 나쁜, 부정적인, 지저분한, 비관적인.... 하지만 네거티브는 일상에서 다른 뜻으로도 사용되고 있지 않은가. 생각할수록 머리만 복잡해졌다.


 그리고 어제였다. 집으로 올라오는 승강기를 탔는데 외국인 두 명도 같이 탔다. 둘은 쉴 새 없이 대화했다. 영어로 떠드는 거니까 나야 반도 못 알아듣는데 어쨌든 그들 대화 중 ‘네이티브’라는 말이 들렸다. 네이티브라면 토박이, 현지인, 뭐 이런 뜻이잖아. 이들의 네이티브 네이티브.... 옆집 할머니들의 네거티브, 네거티브.... 어느새 내 머릿속에선 네이티브와 네거티브가 섞여 헷갈리기 시작했다. 

 사실 나야 일상에서 네거티브든 네이티브든 쓸 일이 거의 없다. 외래어, 즉 외국에서 온 말이지만 우리나라에 아예 토착화, 정착화되어 우리말처럼 쓰는 엘리베이터, 오렌지주스, 컴퓨터, 핸드폰, 쿠션, 뭐 이런 게 아니니까 말이다. 


 어쨌거나 승강기는 10층에 도착했고 여전히 네거티브, 네이티브 하며 현관문을 열려고 하는 순간, 옆집 문이 벌컥 열리더니 “야야! 퍼뜩 이리 와 봐라!” 할머니가 급히 나를 부르셨다. 할머니의 부름에 열던 현관문을 도로 닫고 옆집으로 갔다. 늘 그렇듯 또 할머니 세 분이 모여 계셨고 TV에서는 뉴스가 한창이었다. 내가 들어서자마자 할머니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물으셨다.

 “내가 티비? 테레비에서 저 냥반이 지금 말하는 거 말이다. 뭔 말이라캤노?”

 “니가 전에 드럽단 뜻이라 했제?”

 “아니다, 이 할망구야! 깨끗하다 뭐 이런 뜻이라 해따. 맞제?”

 아니, 네거티브란 단어 하나가 이렇게 나를 황급히 부를 일이었다니. 조금 기가 차기도 했고 어이없기도 했다. 그렇지만 할머니들에게 네거티브의 뜻을 다시 자세히 설명해 드렸다. 내 설명이 끝나자 욕쟁이 할머니가 TV 뉴스 쪽으로 소리를 버럭 지르셨다.

 “저 숭악한 것들이 노인네들 표가 얼마나 많은데, 그럼 노인네들도 알아먹을 수 있는 말로 씨불랑거려야 할 거 아이가. 즈그끼리만 알아 묵는 말로 씨부리놓고 우리더러 찍기는 찍어달라카믄 되나 이 말이다. 뭐? 내...내가 티비? 이런 니미!”

 

 가만 생각해보면 욕쟁이 할머니의 말씀이 틀린 게 없다. 대한민국 투표권은 만 18세 이상 모든 국민에게 있다. 그러니 선거 관련 방송을 할 때는 18세도 88세도 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해야만 형평에 맞는다. 또한 대한민국 선거이므로 가능한 외국어보다는 우리말을 사용하는 게 옳다. 


 네거티브를 진짜 어떤 우리말 명사로 순화하는 게 좋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히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다 문득 무릎을 탁 쳐본다. 

 흠티! 그래, 네거티브 대신 흠티가 어떨까. 어떤 사물의 모자라거나 잘못된 부분, 사람의 성격이나 언행에 나타나는 부족한 점을 뜻하는 ‘흠’과, 어떠한 태도나 기색이란 의미의 말인 ‘티’를 합성한 단어.

 ‘2022년 봄에 치러질 제20대 대통령 선거는, 흠티 없이 깨끗한 선거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