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기

[2023 공모전 당선작] 으뜸상 - "엄마, 태그리스 게이트가 무슨 뜻이에요?"

  • 등록자: 서현정
  • 등록일: 2023.10.31
  • 조회수: 143

"엄마, 태그리스 게이트가 무슨 뜻이에요?"

서현정(으뜸상)

 

얼마 전, 초등학교 저학년생인 딸아이와 함께 경전철을 이용했을 때였다. 교통카드를 꺼내 개찰구에 찍고 들어가려는데, <태그리스 게이트>라고 쓰여 있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딸아이는 그 앞에서 잠시 멈칫하더니 “엄마, 저기 적혀있는 태그리스 게이트라는 말이 무슨 뜻이에요?”라고 내게 물었다. 한글로 ‘태그리스’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니 직관적으로는 카드를 찍지 않는다는 뜻 같았는데, 나도 정확한 뜻은 몰라 그 자리에 서서 고개만 갸웃거렸다. 


그때였다. 한 대학생이 우리가 서 있던 태그리스 게이트로 들어가 교통카드를 찍지 않고 그대로 개찰구를 쓱 하고 지나갔다. 그 모습을 보고서도 나는 아직 태그리스 게이트라는 용어의 뜻이 정확히 이해되진 않았다. 

마침 근처를 지나가는 역무원이 보여 그쪽으로 다가가 “저기, 태그리스 게이트라는 게 무슨 뜻이죠?”라고 물었다. 그러자 역무원은 “번거롭게 직접 교통카드를 찍지 않아도 휴대전화에서 자동으로 결제되는 시스템이에요. 고속도로의 하이패스 구간처럼요!”라고 설명해주었다. 


역무원의 설명을 듣고 난 후에야 비로소 나는 태그리스가 ‘비접촉 요금 결제’를 뜻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우리 국민 중 태그리스라는 용어의 뜻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었다. 사람들에게 편리함을 주기 위해 고안해 낸 정책에 굳이 뜻을 알기 어려운 외국어 명칭을 왜 붙이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편, 역무원은 경전철에서 다른 노선으로 환승해 태그리스 게이트가 없는 곳에서 내릴 때는 기존의 엔에프시(NFC) 결제를 이용하면 된다면서 “휴대전화에 티머니 앱을 설치한 뒤에 카드를 등록하고, 블루투스 모드를 켜놓으면 돼요.”라고 덧붙여 설명해 주었다. 


분명 역무원은 내게 사용 방법까지 친절히 설명해 주었지만, 이번엔 엔에프시(NFC)라는 게 무슨 말인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충 통신기술을 표현하는 약자인 것 같긴 한데 정확한 뜻이 무엇인지는 몰랐다. 

딸과 함께 지하철에 오른 나는 엔에프시(NFC)가 무슨 뜻인지에 대해 찾아보았다. 아주 짧은 거리에서 이뤄지는 비접촉식 통신기술을 일컫는 말이었다. 엔에프시(NFC)라는 로마자도 기억하기 어려운데, 심지어는 ‘Near Field Communication’의 약자였다. 

엔에프시(NFC)의 의미를 알려주자 딸아이는 “엄마도 모르는 외국어를 저 같은 어린이가 어떻게 이해해요?”라면서, 지하철과 같은 공공장소에서는 누구나 바로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용어들을 사용했으면 좋겠다고 자신의 바람을 밝혔다. 

나 역시 딸아이와 생각이 같았다. 개찰구를 통과할 때 교통카드를 직접 찍지 않도록 한 것은 분명 영유아를 동반한 사람이나, 무거운 짐을 든 사람, 목발이나 휠체어를 이용하는 사람들 등과 같은 교통약자들의 편의성을 높여줄 수 있는 선진적인 정책이었다. 


이렇게 좋은 취지의 정책인 만큼 더 많은 사람이 더 쉽게 알아듣고 기억할 수 있도록 <태그리스 게이트>라는 어려운 외국어 대신 <비접촉식 결제 구간>이라는 우리말 표현을 썼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들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지하철역을 둘러보니 생명과 연관된 기구들에도 뜻을 알기 힘든 외국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심장을 뛰게 하는 전기제품은 ‘HEART ON AED’라고 적어 놓았고, 자동제세동기를 ‘AED’라고 표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생명과 직접 연관된 공공언어이고 이해도가 떨어지면 안전 문제와도 직결될 수 있는 만큼,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우리말로 표기를 하는 게 더 효과적일 거라고 딸아이에게 말해주었다. 


지하철에 오르자마자 딸아이는 휴대전화를 꺼내 무언가를 열심히 적었다. 알고 보니 지하철공사 누리집에 접속해 지하철 내에서 사용하는 공공용어들에 외국어 대신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우리말 표현을 썼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남기고 있었다. 기특한 마음에 나는 딸아이와 눈을 맞추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최근 공공언어에 어렵고 생소한 외국어 용어가 쓰이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경험하곤 한다. 물론 외래어의 사용이 불가피한 경우도 있지만, 내용보다는 겉치레를 중시하는 세태를 반영하는 것 같아 씁쓸한 마음을 감추기 힘들 때가 많다. 


공공장소에서 쓰는 공공언어를 쉬운 우리말로 사용하는 일은 정책의 실효성을 높이고, 나아가 국민들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공공장소에서 외국어가 무분별하게 남용되는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는 국민 개개인이 개선의 의지를 가지고 꾸준히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딸아이의 행동은 비록 작은 날갯짓에 불과하지만, 이런 노력이 하나둘 쌓이다 보면 현재 공공언어에서 과도하게 사용되는 외국어들이 언젠가는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