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기

[2023 공모전 당선작] 북돋음상 - 영어가 디자인이 되는 세상

  • 등록자: 이정민
  • 등록일: 2023.10.31
  • 조회수: 107

영어가 디자인이 되는 세상

이정민(북돋음상)

  

 

7월 중순 오랜만에 시내버스를 탔다. 내가 탄 버스는 만들어진 지 얼마 안 되었는지 꽤 신식 버스였다. 앉을 자리가 없어 내리는 문 앞에 서 있었는데 다음 정거장에 도착했을 때 놀라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버스가 정차하고 버스 문이 열렸는데 옆으로 열리는 게 아니라 안쪽으로 열리는 방식이라 문 바로 앞에 서 있는 내 쪽으로 열렸던 것이었다. 왜 경고문이 없지? 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바닥에 ‘NO STANDING AREA’라고 쓰여있는 걸 발견했다. 한글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영어를 읽을 줄 알았던 나는 ‘아, 여기 서 있으면 안 되는구나.’ 하는 동시에 ‘영어를 모르는 분들은 이걸 어떻게 이해하라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에 핸드폰을 쓰며 바닥을 보고 있었는데도 그 문장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평소에 사용하는 익숙한 영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버스는 어린이와 노인들도 많이 사용하는 공간인데, 위험하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로마자로 적어두는 것이 맞을까? “서 있지 마시오”라고 적어두는 게 어려웠던 걸까? 만약 민첩성이 떨어지는 노인분께서 내 자리에 서 있었다면 사고로 이어졌을 수도 있었을 거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나처럼 불편함을 느낀다는 글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대체 왜 이렇게 된 것일까?


그다음 정거장부터는 앉아서 갈 수 있었다. 자리에 앉아서 외국어 남용에 대해 생각하다 예전에 비슷했던 경험이 떠올랐다. 2016년 당시에 나는 중학교 2학년이었는데 하굣길에 버스정류장을 지나던 참이었다. 그때 한 할머니께서 나를 붙잡으시더니 집에 가는 버스가 뭔지 모르겠다고 도와주면 안 되겠냐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거셨다. “집이 어디신데요?” 묻는 나의 말에 “푸르미 뭐시기인데 잘 모르겠어. 아파트인데….”라고 답하셨다. 할머니는 길을 잃은 아이처럼 떨리고 불안해 보이셨다. 나도 빨리 할머니께 집으로 가는 버스를 찾아드리고 싶었지만 곤란하게도 내 기억에 푸르미 아파트는 없었다. 아파트 이름을 잘못 알고 계신 거 같은데 더 기억나시는 건 없는지 물었지만, 잘 모르겠다는 답만 돌아왔다. 더 이상 도와드릴 수 있는 건 없었지만 할머니를 혼자 두고 갈 수는 없었기에 함께 버스 정류장에 있기로 했다. 다음 버스가 오면 기사님께 푸르미랑 비슷한 아파트가 있는지 물어볼 생각이었다.


10분 정도 기다렸을까. 버스 한 대가 정차했고 기사님께 “혹시 푸르미랑 비슷한 아파트 아시나요? 할머님께서 집에 가셔야 하는데 아파트 이름을 모르겠다고 하셔서요.” 물었다. “그거 포미타운 아닐까? 할머니! 포미타운 맞아요? 용해동!” 기사님의 말을 들은 할머니의 표정이 밝아졌다. “맞아, 그거야.” “이 버스 거기 앞까지 가요. 타세요.” 생각보다 쉽게 문제가 해결됐다. 포미타운은 나도 아는 아파트였다. 할머니는 나에게 고맙다고 연신 말씀하시면서 동전 지갑에서 500원짜리 동전 8개를 꺼내 내 손에 쥐여주셨다. 실질적으로 나는 도와드린 게 없는데 고마워하시는 모습을 보니 머쓱한 기분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처음으로 외국어 표기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나는 너무 당연하게 외우고 있던 아파트 이름을 할머니는 외울 수 없어서 집을 찾아갈 수가 없었다. 그 기억이 문득 떠올라 요즘 아파트 이름을 찾아봤다. ‘호반베르디움더클래스’, ‘푸르지오라비엔오르센토데시앙’등은 한 번 봐서는 절대 외울 수 없는 이름이다. 이제는 영어를 넘어서 프랑스어까지 사용해서 짓고 있다.



더 이상 버스정류장에서 만난 할머니가 아파트 이름을 외우지 못한 것은 남 일이 아니게 되었다. 불과 작년에 회사에서 주소를 작성할 일이 있었다. 당시에 나는 신도시의 한 오피스텔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 오피스텔 이름은 무려 11글자였다.

서류에 주소를 작성하려고 보니 오피스텔 이름의 단어 순서가 헷갈리기 시작했다. 주소는 정확히 적어야 하므로 양해를 구하고 인터넷에 주소를 검색해 작성했다. “주소 안 외우세요? 신기하네.” 하던 대리님의 말에 “오피스텔명이 헷갈려서요. 요즘 너무 길고, 어렵게 짓네요.”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의 대한민국에서는 “예쁘잖아요.”라는 핑계로 영어가 디자인이 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컵라면 조리법에 3분 대신 ‘3min’으로 표기되어 있다. 아파트 단지의 경로당은 ‘SENIORS CLUB(시니어스 클럽)’으로 불리고 있다. 화장품에는 더 이상 한글을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한글로 표기된 화장품이 특별한 제품으로 취급되고 있다.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외국어는 정보가 아닌 장식으로 다가오게 된다. 하지만 디자인은 정보를 전달하는 매개이다. 본래의 목적에 맞게 사람들이 한눈에 이해할 수 있도록 한글로 표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로마자나 외국 글자 표기가 필수적이지 않다면 외국어 사용을 최소화하도록 노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