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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쉬운 우리 새말] 갈등이 풀리면 다시 돌아올 수 있는 등돌림 문화 김정희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 새말 모임에서 다듬는 외국어 신조어는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예전부터 있었던 개념으로 이미 우리말 이름이 있는데도 특별한 이유 없이 영어로 바꿔 부르기 시작한 말이 그 한 가지다. 이번 달 새말 모임에서 다듬은 외국어 중 ‘머니 무브’나 ‘뱅크 런’ 등이 그렇다. 딱히 새로운 현상도 아닌데 멀쩡한 우리말로 불리던 ‘자금 이동’, ‘인출 폭주’가 어느 순간 영어로 둔갑했다. 새말 모임은 원래 쓰이던 이 우리말을 새삼 ‘새말’로 되돌렸다. 또 다른 하나는 새롭게 등장한 기술이나 현상이라 우리말로 이를 일컬을 말이 정착하기 전에 영어 표현부터 쓰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부터 살펴볼 ‘캔슬 컬처(cancel culture)’가 그렇다. 캔슬 컬처는 “유명인이나 공적 지위에 있는 인사가 논쟁이 될 만한 행동이나 발언을 했을 때 사회 관계망 서비스(에스엔에스) 등에서 해당 인물에 대한 팔로우를 취소하고 거부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인종, 계급, 성별 등에서 소수자를 주류 세력이 차별하고 배제하는 현상은 이전부터 있었던 터. 그런데 인터넷상의 공동체와 사회 관계망이 발달하면서 ‘(트위터 등의) 팔로우’나 ‘(페이스북의) 친구 관계’를 ‘취소’한다는 뜻에서 ‘캔슬 컬처’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용어가 널리 퍼진 것은 미국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 간에 인터넷상의 차단, 배척 현상이 두드러지면서다. 국내 언론에 처음 소개된 것도 같은 시기인 2019년 10월 <서울신문> 기사를 통해서다. 그 외에도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캔슬 컬처에 대해 “진정한 변화를 위해서는 자신만이 정치적으로 옳다고 여기며 타인을 비난하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고 호소했다.”(<한겨레21> 2020년 9월) “가나 출신 방송인 샘 오취리가 한국에 대해 ‘캔슬 컬처’가 심한 편이라고 지적했다. 캔슬 컬처는 유명인이 잘못을 저지르면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언팔로하는 등 보이콧하는 현상을 뜻한다.”(<머니투데이> 2023년 2월 1일) 등의 용례가 있다. 이 용어는 인터넷 사회 관계망의 ‘취소’로만 쓰이지 않는다.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상품의 불매운동,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는 유명인사의 창작물 고발, 연주자의 공연 출연 배제 등 온라인 외의 공간과 맥락에서도 두루 쓰이고 있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를 옹호한 음악인들의 무대 공연을 철회하거나 섭외를 중단한 문화계 움직임도 ‘캔슬 컬처’라 불렸다. ‘캔슬 컬처’를 우리말로 옮긴 예를 찾아보았다. 영어 뜻 그대로 옮겨 ‘취소 문화’라고 옮긴 사례(<서울신문> 등)가 간혹 있고 위키백과 역시 ‘취소 문화’라고 소개하고 있지만 이런 ‘직역’은 많이 눈에 띄지 않는다. 온라인 사회관계망 외에서 두루 쓰이기엔 다소 부족함이 있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대신 <한국일보>나 <한겨레>는 ‘손절 문화’, ‘철회 문화’라고 옮기기도 했다. <국민일보> 역시 “캔슬은 ‘취소’보다는 지지 철회나 손절, 배척, 사회적 매장, 응징, 온라인 몰매로 해석하는 게 적절하다”고 제안한 바 있다. ‘단어+단어’의 간단한 형태로 옮기기 애매하다 보니 ‘온라인 왕따 현상’ ‘온라인상 집단 비방 문화’라고 수식하거나, 괄호 안에 문장으로 풀어서 설명을 덧붙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게다가 작은따옴표로 묶어 '캔슬 문화'라고 적은 뒤, 아예 우리말 뜻풀이를 생략해 버리는 경우도 늘고 있는 형편이다. 이렇게 적절한 대체 우리말이 정착되지 않고, 뜻풀이도 없이 영어 표현만 사용하는 경우가 늘어나는 추세로 볼 때 빨리 새말을 다듬어 보급하지 않으면 영문 ‘캔슬 컬처’가 그대로 우리 사회에 뿌리를 내려버리는 게 아닌가 우려된다. 그래서 새말 모임이 서둘러 우리말 순화작업을 할 필요가 더해진 것이다. 새말 모임에서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 결과 다듬어낸 우리말 표현은 ‘배척 문화’, ‘등돌리기/등돌림(현상/문화)’, ‘지지취소 문화’, ‘거절(거부) 문화’, ‘유행성 등돌리기’, ‘추방 문화’ 등 온라인에서 일어나는 현상만을 지칭하지 않고, ‘배척’, ‘퇴출’보다는 부드럽고 너른 폭으로 사용할 수 있는 표현을 찾고자 고민했다. 그래서 최종 결정된 후보는 ‘거부 문화’, ‘등돌림 문화’, ‘삭제 문화’였고, 이 중 여론조사 결과 ‘등돌림 문화’의 선호도가 가장 높아 최종 새말로 결정되었다. 개인적으로도 외국어를 우리말로 다듬을 때는 한자어보다 아예 순우리말인 ‘등돌림’을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여겨진다. ‘ㅇ’과 ‘ㄹ’을 많이 사용해 어감도 부드럽고 입에 감긴다. 게다가, 새말 모임에서도 나온 의견처럼, 등을 돌린다는 것은 상대를 이해하고 갈등이 해소되었을 때 다시 앞으로 돌아서서 상대를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만큼 ‘캔슬’이라는 영어는 물론이요 ‘취소’나 ‘삭제’보다 더 희망적인 표현이 아닐까 싶다. ※ 새말 모임은 어려운 외래 '다듬을 말'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지기 전에 일반 국민이 이해하기 쉬운 '새말'로 다듬어 국민에게 제공하기 위해 국어, 언론, 문학, 정보통신, 환경 등 여러 분야 사람들로 구성된 위원회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국어원이 모임을 꾸리고 있다. 김정희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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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쉬운 우리 새말] 국산 영어 그린 오션 대신 친환경 시장 김정희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 특정 산업을 시장 점유 정도, 발전 가능성 등에 따라 색깔로 나타낸 영어 명칭들이 있다. 아직 경쟁자가 없는 유망시장을 가리키는 ‘블루 오션’, 경쟁이 심하고 포화상태에 이른 시장 ‘레드 오션’, 기존 레드 오션에 발상의 전환을 꾀해 새로운 시장 가치를 개척하는 ‘퍼플 오션’이 그것이다. 국립국어원에서는 이미 이들 중 ‘블루 오션’을 ‘대안 시장’으로, ‘레드 오션’을 ‘포화 시장’으로 다듬어 선보인 바 있다. 아직 ‘퍼플 오션’은 우리 새말로 다듬어 내지 못하고 있는 와중에 또 하나의 ‘색깔’이 등장했다. ‘그린 오션(green ocean)’이다. ‘그린’이라는 단어의 쓰임새로 뜻을 짐작해보시라. 농산물 시장? 그럴 수도 있겠다. 실제로 2006년 한 신문에서 그런 의미로 사용한 적이 있다. 하지만 요즘 이 용어는 ‘친환경이 가진 가치를 경쟁 요소로 내세워 새로운 시장과 부가 가치를 창출하는 산업’을 뜻한다. 영어에서 ‘친환경’은 ‘에코-프렌들리(eco-friendly)’ 혹은 말머리에 ‘에코’만을 붙여 표현하지만 ‘그린’ 역시 보편적으로 쓰인다. 친환경 단체로 유명한 ‘그린 피스’나 ‘친환경 에너지원’을 뜻하는 ‘그린 에너지’ 등이 익숙한 표현이다. 그렇다면 ‘그린 오션’도 영어권에서 쓰이는 말일까. 답은 ‘그렇지 않다’. 영어권에서 ‘그린 오션’은 ‘녹색’이라는 단어의 원뜻 그대로 ‘녹색 바다’라는 뜻이다. 친환경과 관련된 뜻은 없다. 환경친화적 산업, 혹은 친환경 시장을 의미하는 ‘그린 오션’은 ‘국산 신조어’인 셈이다. 언론에서 ‘그린 오션’을 처음 언급한 것은 2005년 7월 <경향신문> 기사이다. 당시 경제 전문가 인터뷰에서 “경제와 환경이 살아야 사회가 산다는 ‘그린 경영’ 접근이 필요하다”는 전문가의 발언에 기자가 “우리 사회의 지속 가능 발전을 위한 ‘그린 오션’이 요구된다는 말이다”라고 설명을 덧붙인 것이 첫 사례다. 이후 한동안 쓰임새가 잦지 않았던 이 표현은 2000년대 말 무렵부터 시민 환경 의식이 높아지고 친환경 상품이나 사업이 각광을 받으며 자주 쓰이게 되었다. 언론 용례는 다음과 같다. “음료 가운데 가장 먼저 비닐 라벨을 제거한 생수업계는 이에스지 경영을 전면에 내세우며 친환경을 기반으로 부가 가치를 창출하는 ‘그린 오션’ 진출에 앞장서고 있다.” (<매일경제> 2021년 10월) “그린 오션이 세계 경제의 판도를 바꾸고 있다. 세계 각국이 환경 규제를 강화하면서 반도체부터 자동차, 전자, 금융, 식품에 이르기까지 전 산업에 걸쳐 경영 패러다임이 변하고 있다.”(<이투데이> 2021년 6월) 이외에도 친환경과 관련해 ‘그린’이라는 표현이 비 온 뒤 대나무 순 돋듯 등장했는데, 이미 많은 ‘그린~’이 새말로 다듬어져 발표되었다. ‘그린 모빌리티’는 ‘친환경 이동 수단’, ‘그린 테일’은 ‘친환경 유통’, ‘그린웨이’는 녹색길, ‘그린 시티’는 ‘녹색도시’, ‘그린슈머’는 ‘녹색소비자’ 등 대부분 ‘친환경’ 혹은 ‘녹색’으로 다듬어졌다. 그런 맥락에서 ‘그린 오션’도 ‘친환경’ 혹은 ‘녹색’으로 바꾸어 넣고, ‘오션’을 ‘시장’ 혹은 ‘산업’으로 대체해 조합한 새말을 후보로 올렸고, 그 중 설문조사 결과 88.1%의 높은 선호도를 보인 ‘친환경 시장’이 새말로 결정되었다(‘녹색 산업’이 76%, ‘녹색 시장’은 67%). 한편 씁쓸한 사실은 영어권에서도 쓰지 않는 ‘국산 영어’, 불필요한 영어 신조어를 국민들에게 ‘적극 소개하고 홍보하는’ 데 정부 관련 기관들이 여전히 ‘앞장서고’ 있다는 점이다. 환경부 지정 국가환경교육센터 누리집은 ‘새 환경용어’라며 “최근 환경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인식이 늘어나면서 새로운 개념, 그린 오션이 등장했다”고 홍보하는가 하면, 초중등 학생을 대상으로 ‘그린 환경일기’를 공모하기도 했다. 서울시공익활동지원센터 누리집에서 역시 “그린워싱(Green washing)을 경계하고, 리얼그린(Real Green)을 실천해야 해요”라는 글과 함께 ‘리유저블컵’, ‘리필스테이션’ 같은 영어가 등장하고 있다. 환경만 사랑해서 쓰겠는가. 우리말도 사랑해야 하지 않겠는가. 안타까운 마음으로 검색을 계속하던 중 앞에서 말한 환경교육센터 누리집에서 ‘초록작당소’라는 단어와 마주쳤다. 정부가 환경 교육을 진행하고자 하는 시민 학생들에게 무료로 제공해주는 장비와 공간에 붙은 이름이었다. 이 얼마나 깜찍하고 발랄한가. 앞으로 ‘그린 어쩌고 센터’ ‘에코 어쩌고 플레이스’ 대신 이런 이름을 보다 자주 접할 수 있길 바라본다. ※ 새말 모임은 어려운 외래 '다듬을 말'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지기 전에 일반 국민이 이해하기 쉬운 '새말'로 다듬어 국민에게 제공하기 위해 국어, 언론, 문학, 정보통신, 환경 등 여러 분야 사람들로 구성된 위원회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국어원이 모임을 꾸리고 있다. 김정희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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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슬 컬처, 그 용어의 모호함 장민지(경남대학교 미디어영상학과 조교수) 캔슬이라는 용어는 사전적으로 ‘취소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내가 무언가를 실행하고자 계획했던 것을 없던 일로 되돌리는 것을 뜻한다. 약속이나 예약을 취소할 때, 우리는 외국어인 ‘캔슬(취소하다)’이라는 용어를 주로 사용해왔기 때문에 캔슬 컬처라는 용어가 수사하고 있는 사회현상을 직접적으로 떠올리기는 어렵다. 현재 국내에서 사용하고 있는 캔슬 컬처라는 용어에서의 ‘캔슬(cancel), 캔슬링(canceling)’이라는 영단어의 의미는 ‘공인들의 행동이나 의견에 관해 반대하거나,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이러한 반대 의사를 표면화’하고, 그들의 지지를 가시적으로 철회, 즉 취소하는 온라인 문화 현상을 뜻하고 있다(서경주, 2020). 캔슬 컬처는 인종, 종교 혹은 성 소수자들을 차별, 혐오하는 발언을 한 공인들의 문제를 지적하기 위해서 해시태그를 통해 온라인상에서 이를 가시화하는 운동에서 시작된 역사를 갖는다. 한국에서도 이러한 문화적 현상을 온라인상에서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다. 단적으로 아이돌 멤버들의 학교폭력 사태가 온라인에서 다양한 증거를 통해 드러나자 그들의 지지를 철회하겠다(보이콧)는 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기획사들은 일제히 입장문과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리고 광고주들은 재빠르게 그들을 광고계에서 삭제하기 시작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에스비에스(SBS)의 과도한 역사 왜곡에 대한 수용자들의 강력한 비판과 이로 인한 <조선구마사> 드라마의 편성 취소는 바로 캔슬 컬처의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제는 수용자들의 강력한 저항과 판결이 대중적인 낙인 효과를 갖게 되었고, 이로 인한 대중적 인식의 변화가 실질적인 행동까지 변화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캔슬 컬처라는 외국어의 사용은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는 실질적인 사회 현상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한다. 심지어 어려움을 ‘더욱’ 겪게 한다는 점은 명백하다. 우리가 캔슬이라는 외국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캔슬 컬처라는 용어가 직접적으로 와닿지 않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특히 ‘반대 의사’를 드러내는 방식으로의 ‘캔슬’이라는 방식이 이 용어를 더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실제로 캔슬은 ‘하지 않음’을 뜻하지만, 캔슬 컬처에서는 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 또한 적극적인 행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캔슬 컬처’라는 용어보다 ‘등돌림 문화’와 같은 한국어 사용이 훨씬 더 이 문화를 이해하는데 직관적일 수 있다. 예를 들어 <배달의 민족>에 입점한 식당들이 소비자들의 평점과 리뷰를 왜 관리하는지 곰곰이 생각해보라. 배달의 민족을 이용하는 구매자들은 이제 더 이상 음식을 소비하는 위치만을 점유하진 않는다. 식당들은 조금이라도 더 많은 리뷰와 높은 별점을 얻기 위해 이용자들에게 최선을 다하며, 이용자들은 리뷰를 통해 자신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표출한다. 그리고 그 의견들은 웹 상으로 축적되어 다방면으로 노출된다. 배달의 민족이라는 어플리케이션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화제가 된 현상들이 또 다른 사이트로 옮겨가며 계속 공유되고, 확산된다. 이것이 일상적으로 우리가 접해온 ‘등돌림 문화’의 일부다. 이러한 문화 현상은 캔슬 컬처라는 용어보다 ‘등돌림 문화’라는 한국어를 통해 설명되기 용이한 지점이 있다. 예를 들어 2009년 박재범이 마이스페이스(myspace)*에 올린 글 때문에 빚어진 2PM 탈퇴사건은 단순한 소비자로 위치되었던 팬덤이 이에 반박하며 그가 속해 있었던 2PM의 모든 활동을 불매하고 배척(보이콧)하겠다는 대규모 시위로 확장되면서 주목받았다. 이 또한 팬들이 대대적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의 기획사로부터 등을 돌린 사건이다. ‘등돌림 문화’라는 용어는 우리에게 단순히 수용자가 수용에 대해 거부하거나 외면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대적으로 ‘거부하겠다’는 의견을 적극적으로 밝히며 대규모의 집단 행위를 동반한다는 문화적 현상을 설명하는데 용이하다. 특히 이러한 문화는 단순히 이전까지의 소극적인 수용거부와는 다른 행태를 보인다. 이 때문에 이전까지 생산-수용 위계에서 하부에 위치하던 수용자의 권력이 강력한 힘을 가진다. 그 힘을 바탕으로 이러한 위계를 전복시킬 수 있는 잠재성을 갖게 된다는 점을 명확히 한다는 면에서 이 용어의 한국적 사용이 빛을 발한다고 볼 수 있다. *마이스페이스: 우리나라의 네이버 블로그, 싸이월드와 유사한 온라인 가상공간. 현재는 없어졌다. 서경주(2020). 캔슬컬처,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언론중재>.156. Jenkins, H., Ford, S., & Green, J. (2013). Spreadable media. New York University Press. Tom Cowie(2019.12.2.) . The Sydney Morning Herald. https://www.smh.com.au/culture/books/cancel-culture-is-the-macquarie-dictionary-s-word-of-the-year-for-2019-20191202-p53fzy.html 장민지 경남대학교 미디어영상학과 조교수 저서: <섹슈얼리티와 퀴어>, <여자들은 집을 찾기 위해 집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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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일 : 2023.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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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itical economy, “정치경제학”인가 “경제학”인가 - 통역과 번역 사이에서 강신준(동아대학교 경제학과 특임교수, 맑스엥겔스 연구소장) 1987년, 마르크스(1818-1883)의 <자본> 제1권(이론과 실천) 출판에 관여한 이후 평생을 마르크스 문헌 번역과 함께하면서 특별히 목에 걸린 가시처럼 불편했던 번역어가 하나 있다. <자본>의 부제목으로 달린 Politische Ökonomie(poltical economy)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대개 “정치경제학”으로 번역하고 있는 이 용어는 원래 애덤 스미스(1723-1790)가 자신의 <국부론> 제4편에서 “국민과 국가를 모두 부유하게 만들고자 하는 학문”의 이름으로 처음 사용하였고 이후 그가 지칭한 이 분야의 모든 학자에게 널리 보급되었다. 애덤 스미스는 이 용어를 완전히 독창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었다. 그는 당시 이미 전래되어 오던 이코노미(economy)라는 용어에 폴리티컬(political)을 결합시켜 이 용어를 만들어내었다. 이코노미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용어로 고대 그리스의 경제 단위였던 가족농장(노예농장)을 관리한다는 의미(즉 경제)를 담고 있었다. 그런데 애덤 스미스가 살던 시기는 고대 그리스 이후 계속 이어져 오던 가족농장 중심의 경제가 국가라는 훨씬 큰 경제 단위로 새롭게 묶인 절대주의 시대였다. 이제 가족농장의 명운은 국가 경제의 부흥에 달려 있었다. 국가를 단위로 하는 새로운 경제를 다루는 학문이 필요하였고 애덤 스미스는 그 학문을 지칭하는 용어로 political economy를 만들어낸 것이다. 즉 이 용어는 경제라는 의미의 economy에 국가를 단위로 한다는 의미로 political을 새롭게 결합한 것이다. 여기에 “정치”라는 개념은 조금도 들어가 있지 않다. 따라서 political economy를 “정치경제학”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그 맥락이나 내용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버리는 일이다. 굳이 번역한다면 “국가경제학” 정도로 번역하는 것이 조금 더 본래의 뜻에 가까울 수 있다. 그림1. 애덤 스미스가 만들어낸 경제학 최초의 명칭 political economy를 처음으로 사용한 데이비드 리카도의 저작(1817년) 그런데 이런 혼란에 또 하나의 어려움이 중첩되어 있다. 바로 economics라는 용어이다. 국내에서 “경제학”으로 번역하고 있는 이 용어는 원래 1890년 영국의 경제학자 앨프리드 마셜이 자신의 저작에서 처음 만들어 사용한 것이다. 그는 애덤 스미스 이후 기존의 학문 체계 가운데 일부(가치론이라고 부르는 부분이다)를 수정하고 그것을 기존의 political economy와 구별하기 위해 economics라는 호칭을 새롭게 끌어다 사용하였다. 즉 economics는 political economy에서 파생되어 나온 하나의 이론에 대해 붙여진 명칭에 불과한 것이다. 그림2. economics를 처음으로 사용한 앨프리드 마셜의 저작(1890년) 그렇다면 이제 문제는 political economy와 economics를 각기 구별하여 “정치경제학”, “경제학”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맞는가 하는 것이다. 이들 두 용어는 모두 경제를 다루는 동일한 학문을 가리키고, 그 학문의 명칭은 내내 political economy로 사용되어 오다가 1890년 마셜이 혼자 예외적으로 economics를 주장했을 뿐이다. 마셜이 수정한 이론에 동의한 학자들은 통칭 신고전파로 불리는데 이들 가운데 제본스, 멩거, 발라 등의 다른 학자들은 아무도 economics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고 모두 political economy를 그대로 사용했다. 애덤 스미스가 처음 정의했듯이 “국민과 국가를 모두 부유하게 만들고자 하는 학문”을 무엇으로 부를 것인지의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political economy와 economics를 서로 다른 명칭으로 부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여기에 또 한 가지 문제가 추가된다. 프랑스와 독일에는 economics라는 용어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프랑스에서는 이 학문을 économie politique로, 독일에서는 Volkswirtschaftswissenschaft, 혹은 Politische Ökonomie로만 부른다. 만일 economics만을 “경제학”으로 번역하고 다른 용어는 다른 말로 번역한다면 이들 두 나라에는 “경제학”으로 번역될 학문이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애덤 스미스가 정의한 학문을 이미 “경제학”으로 번역해서 사용하고 있다. 그를 흔히 경제학의 아버지로 부르는 것이 바로 그 증거이다. 하지만 economics는 1890년에야 비로소 처음 나타난 용어이고 애덤 스미스가 살던 시기에는 당연히 존재하지 않았다. economics만을 경제학으로 부를 수 없는 이유이다. 요컨대 경제학은 영국에서 처음 만들어져 세계 각국으로 보급된 학문으로, 그 명칭은 시기별로, 그리고 각 나라별로 제각기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던 것이다. 이들 다양한 명칭은 모두 동일한 학문을 가리키는 것인 만큼 하나의 용어, 즉 “경제학”으로 통일해서 부르는 것이 당연하다. 사실 이 문제는 동양에서 가장 먼저 마르크스를 번역했던 일본에서 이미 겪었던 문제이기도 하다. 일본에서도 political economy와 economics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지를 둘러싸고 고민이 있었고 학자들마다 제각기 “정치경제학”이나 “경제학”으로 번역하면서 혼선을 빚다가 1998년 나고야 대학의 다케모토 히로시 교수가 이 문제를 논리적으로 정리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적어도 일본의 마르크스 경제학자들은 political economy를 모두 “경제학”으로 통일해서 부르고 있다. 그래서 <자본>의 부제목도 “경제학 비판”으로 붙여져 있다. 그림3. 일본에서 출판된 <자본론> 번역본, 부제목으로 “경제학 비판”이 붙어 있다. 이 문제에 숨겨져 있는 또 하나의 문제는 통역과 번역의 차이에 관한 것이다. political economy를 “정치경제학”으로 번역하는 사람들은 모두 “political”이라는 말의 형태에 집착한다. 그것이 “정치적”으로 번역되는 단어라는 것이다. 이것은 외국어를 “형태” 그대로 옮기는 것, 대개 직역이라고도 부르는 것으로 통역의 경우에 해당한다. 그러나 번역은 통역과 달리 외국어에 담긴 “내용”을 전달하는 것이 핵심이다. political economy의 번역은 바로 통역과 번역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부연하자면 독일에서 이 학문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는 Volkswirtschaftswissenschaft도 “국민경제학”이 아니라 그냥 “경제학”으로 번역해야 맞다. 이 용어 역시 경제학의 다양한 명칭 가운데 하나일 뿐이기 때문이다. 강신준(교수, 연구소장) 동아대학교 경제학과 특임교수, 맑스엥겔스 연구소장 저서: <자본의 이해>, <오늘 자본을 읽다>, <마르크스의 자본, 판도라의 상자를 열다> 역서: <자본>1~3(카를 마르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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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자 : 한글문화연대
- 등록일 : 2023.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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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어 못지 않은 구조적 언어 차별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 작가) 얼마 전 장애인 권리 예산의 확보를 요구하는 자리에서 지지발언을 하다가 나도 모르게 말이 꼬였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 같은 인간입니다.”라고 해야 할 걸 “장애인과 비정상인 모두 같은 인간입니다.”라고 한 것이다. ‘비장애인’이라고 해야할 걸 ‘비정상인’이라고 했으니, 시각장애인인 나조차 아직도 ‘장애인-비장애인’이라는 낱말짝이 자연스럽지 않은가 보다. 그럼에도 이제 제법 많은 사람에게 ‘장애인-비장애인’이라는 낱말짝이 자리를 잡아간다. 장애인 외에 장애인이 아닌 사람은 비장애인으로 일컫자는 의견이다. 그전에는 ‘장애인-정상인’이라는 낱말짝이 자주 쓰였는데, 그런 구도라면 장애인은 ‘비정상인’이냐는 문제 제기가 많았다. 세상을 장애가 없는 사람의 기준에서 ‘정상’과 ‘비정상’으로 구분하는 태도가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라는 점을 많은 사람이 받아들이니, 그만큼 우리 사회에서 ‘차별’이라는 주제가 사람들에게 민감하게 다가가나 보다. 언어적 차별은 차별어를 통해 가장 극명하게 표현된다. ‘장애인-정상인’과 같은 낱말짝이나 서울 중심의 ‘상행선-하행선’ 같은 낱말짝 형식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남자 교수에게는 ‘남교수’라고 안 하지만 ‘교수-여교수’처럼 사회적 약자인 특정 집단을 특이 현상인 양 부르므로써 보편적이지 않고 주류가 아니라는 인상을 풍기게 하는 형식도 있다. 물론 ‘맘충, 한남충, 김치녀’처럼 혐오의 의도를 가지고 만든 혐오표현이 가장 노골적인 차별어이며, 차별의 전통을 담고 있는 ‘암탉이 울면.... 어디서 여자가....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등의 말도 혐오가 밴 차별어의 한 가지 형식이다. 노골적인 차별어 어휘에 대해서는 선악 판단이 그리 어렵지 않다. 물론, 구조적으로, 역사적으로 벌어진 차별을 비판적으로 보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여기는 고정관념이 강할수록 차별어를 차별어로 인정하는 데에 시간이 걸린다. 예를 들어 ‘유모차’와 같은 용어가 아이 키우는 일은 여성의 고정적인 성 역할이라는 말빛을 풍기므로 이를 ‘유아차, 아기차’로 바꾸자고 할 때 어느 특정 역사 시기에 여성이 육아를 주로 담당했던 사실을 변치 않는 자연 섭리처럼 받아들였던 사람에게는 거부감이 이는 것이다. 따라서 차별어에 대해 고민할 때는 생각을 매우 개방적으로, 탄력적으로 열어놓아야 한다. 세상 변화를 통해서 깨달을 수도 있지만 필요하다면 사회과학이나 인문학 공부를 해야할 수도 있다. 다만, 두 가지 경우에 자주 논란이 일어난다. 이게 차별이냐 아니냐 갑론을박을 해대는데, 하나는 사회적 약자의 정체성을 이름에 붙이는 경우와 다른 하나는 비유적 표현으로 장애나 여성을 거론할 경우이다. 내 생각은 이렇다. 첫째, 언제든 ‘여,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드러내는 일이 반드시 차별적이냐는 질문이 있다. “여교수들은 이래서 문제다, 여직원들은 이래서 한계가 있다”라고 집단화하여 여성 구성원을 차별하는 언사는 당연히 차별 행위이다. 하지만, 사회적 약자인 여성들의 권익 신장을 위해 일부러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드러내어 조직 이름을 붙이는 경우에,그것이 스스로 차별의 올가미를 거는 일이라고 볼 까닭은 없다. ‘여성노동자회, 여의사회, 남자간호사회’ 등의 사회적 약자 모임에 성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일이 스스로 차별을 받아들이는 행위는 아닌 것이다. 오히려 차별을 극복하기 위한 집단화, 힘 모으기 장치라고 보는 게 맞지 않을까? 둘째, 비유적 표현으로 ‘치마바람, 처녀작’ 또는 ‘외눈박이’처럼 여성과 장애를 들먹이는 경우에 이게 언어적 차별이냐는 논란이다. 내가 보기엔, 말한 이에게 의도가 없었다 하더라도 그 말을 접한 여성이나 장애인에게는 그것이 차별의 느낌으로 다가온다. 따지고 보면, 외눈박이, 장님, 귀머거리, 벙어리 등의 말은 혐오의 의도를 가지고 만든 말이 아니다. 단지 그런 사람들을 가리키고 부르기 위해 지은 이름인데, 그 존재들을 차별했기 때문에 그 이름들도 차별의 용례로 자주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 말 안에 차별의 말빛이 깊이 아로새겨져 그 말을 듣는 당사자들이 차별의 느낌을 받게 된다. 대체로 인용과 경구에서 많이 쓰이는 이런 말은 요즘의 말로 바꾸어야 한다. 굳이 차별 시비를 일으키면서 이런 말을 사용해야 할 까닭이 없다. “세상을 한 눈으로 보지 말라.”고 말하는 대신 “세상의 다양한 면을 모두 봐라, 편견을 가지고 한쪽만 보지는 말라.” 뭐, 이렇게 말하자는 것이다. 차별어가 나쁘다는 사실은 굳이 근거를 들이대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차별의 부당함을 알아채는 순간 싹트게 된다. 남녀 차별, 장애 차별, 지역 차별, 인종과 민족 차별, 외모 차별 등은 비교적 차별의 부당성이 명백하므로 차별어의 사용에는 나쁜 짓이라는 딱지가 붙는다. 얼마 전까지는 지위와 재산에 따른 차별도 그다지 좋지 않은 것으로 비쳐졌고, 학벌과 학력의 차별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매우 걱정스럽게도, 이런 시각이 점차 무너지고 있다. 능력과 노력을 기준으로 차등적으로 대우하고 보상하는 것은 죄악시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널리 퍼지다 보니 성공한 이와 실패한 이,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명문대 출신과 비명문대 출신을 차별하는 것이 무슨 문제겠냐는 일종의 뻔뻔함이 바짝 고개를 뜬다. 능력과 노력에 따라 성과를 차등적으로 배분하는 것이 공정하다는 능력주의 신념은 특권이나 편법을 배격한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이다. 그러나 그 신념이 도가 지나치면 성공과 성과에 배어 있는 다양한 행운과 보이지 않는 타인의 수고를 모두 무시하고 자신의 성공은 오로지 자신의 능력과 노력 덕분이라고만 생각하게 하여 ‘능력자’들을 오만하게 만들고 ‘무능력자’들을 저주받은 존재로 낙인찍는다. 여기서 언어, 특히 외국어가 구조적 차별의 장치로 작동한다. 대기업 인사 담당자들은 채용 때 영어 능력을 보는 것이 그 사람의 전반적인 능력을 보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 사람이 영어 성적을 내기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은 확인해준다고 말한다. 우리 사회에서 영어 능력은 선발의 기준이자 사회적 자격의 표상으로 여겨진다. 그러다 보니 어려운 말을 유창하게 구사하여 배운 티를 내는 것, 외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다는 능력을 보여주는 것은 능력자들이 겉으로 학벌과 신분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는 전형적인 방법이 되었다. 낮은 학력, 안 좋은 학벌은 그들이 노력하지 않았고 능력이 없기 때문이며, 외국어 능력이 떨어지는 것은 그저 그들 스스로의 책임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영어 마구 쓰는 걸 전혀 이상해 하지 않고, 영어 모르는 사람들이 불평을 하기도 어려운 구조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는 공동체 성원을 배려하면서 불평등을 줄이려는 언어 문화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넘기 어려운 구조적 차별인 셈이다. 차별어 어휘 사용이 선과 악을 가를 수 있는 분명함을 가지고 있다면 능력주의에 바탕을 둔 영어 남용과 여기에서 비롯한 언어적 차별은 선과 악으로 가르기가 쉽지 않다. 어느 지점까지는 자연스러운 욕구라고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공동 선’의 관점에서 영어 남용을 줄이자고 말할 수 있을까? 우선 공공영역과 개인영역을 나눌 필요가 있겠다. 우리네 공용어가 한국어인 이상 적어도 공공영역에서는 우리말로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우리말로 표현하자는 합의가 가능하다. 그것이 외국어 능력에 따라 국민의 알 권리를 차별할 위험을 줄이고 정보 접근의 불평등 구조를 풀어가는 첫걸음이니까. 개인 영역에서도 그저 개인의 취향에 맡길 일만은 아니리라. 개인의 전문 영역에서 우리말 위주로 일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지식 대중화의 발판이 된다. 개인이 일상 생활에서 우리말 위주로 대화하려는 노력 또한 한함께 살아가는 공동체 성원으로서 자긍심과 공동체 의식을 북돋는 일이 될 것이다. 물론 어떤 가치를 선택하는가, 언어에 어떤 가치를 부여하려 하는가는 개인의 자유이긴 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 하나는, 언어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묶어주는 노릇을 하기 때문에 그 안에 평등과 차별의 구조가 반영되고, 현실에서는 언어가 능동적으로 그 구조를 만들기도 한다는 점이다. * 이 글은 한국어문기자협회 <말과 글> 제174호에도 실렸습니다.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 작가 서울시와 경기도 국어바르게쓰기위원 국토교통부 철도역명심의위원 역임 저서에 [언어는 인권이다], [한자 신기루]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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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약칭 제안 모임', 나서서 줄임말을 만든다고?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 작가) 올 3월 10일에 한국기자협회, 방송기자연합회, 한국어문기자협회, 한글학회, 한글문화연대 등이 뜻을 모아 ‘우리말 약칭 제안 모임’을 꾸렸다. 국립국어원도 협의에 참여한다. 각 단체에서 추천한 연구위원들이 모여 4월 7일에 첫 회의를 열어 운영 방안을 정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를 영문 이름 약칭인 ‘오이시디(OECD)’로 쓰는 일이 많은데, 이 대신 ‘경협기구’와 같이 우리말로 줄인 이름을 만들자는 것이다. 이게 잘 먹힐 일인지, 아니면 욕 먹을 일인지 모르겠다. 무수한 줄임말 신조어 때문에 정신 사나워서 줄임말이라면 손사래치는 분이 많은데, 나서서 줄임말을 만들겠다니 말이다. 줄임말 문화를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은 그 말뜻을 바로 알아채기 어려운 상태에서 대화가 진행되다 보니 우선 소통이 어렵고 그 다음엔 내가 뭔가 뒤처지는 건가 싶어 주눅이 든다고 한다. 모르는 말이 등장할 때 누구나 흔히 겪는 사정이다. 그렇지만 이건 못 알아듣는 줄임말이 등장했을 때의 일이고, '기재부(기획재정부), 대입(대학입시), 경북(경상북도)'처럼 이미 알고 있는 줄임말이 나온다면 사정은 완전히 달라진다. 그 용어들이 줄임말이라는 자각도 별로 없으리라. 그러니 새로 나온 줄임말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 없느냐는 그 말의 출현 횟수, 접촉 횟수, 사용 횟수가 얼마나 되느냐에 달려 있는 것 같다. 익숙해지면 크게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물론, 자주 쓰는 말이라면 외국어건 상말이건 차별어건 혐오 표현이건 모두 정당하고 사용할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이 아니라, 말살이의 변화가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피워갈지 고민하는 일은 여전히 쉽고 바른 소통을 꾀하는 사람들의 몫으로 남는다. 젊은 세대가 주도하고 있는 줄임말 문화를 어떻게 평가하고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말을 줄여 쓰는 것이 좋으냐 안 좋으냐 하는 판단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고, 말마다 상황마다 다를 수 있다. 의미가 어렵고 낯선 말은 되도록 줄여 쓰지 않는 게 좋다. 말을 줄여 빠르고 간단하게 전달하려는 ‘경제성’과 말이 길더라도 정확하고 풍부하게 전달하려는 ‘소통성’은 끊임없이 줄다리기를 하는데, 어느 한쪽을 일방적으로 편들 수는 없다. 말을 줄이려는 욕구나 말을 줄여 새말을 만드는 방법은 매우 오래된 언어 사용법이고, 여러 가지 현상과 개념과 기술과 느낌이 얽히고설켜 가는 현대 사회에서 이런 새로운 것들을 표현하는 데에 말 줄임은 불가피한 것 같다. 사실, 30년 전에도 전경련(전국경제인연합회), 옥떨메(옥상에서 떨어진 메주), 우심깜뽀하(우리 심심한데 깜깜한 데 가서 뽀뽀나 하까?)와 같은 줄임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약칭, 약어, 은어 차원에서 수많은 줄임말이 사용되었다. 요즘의 세태만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 말의 압축 정도와 사용 빈도가 과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무지막지하다. 이런 말 줄임 현상이 아직은 비공식적인 영역에서 득세하고 있지만, 언젠가 지금의 젊은 세대가 공식 영역의 언어를 좌우하게 될 가까운 미래에 공식 영역, 공공언어 영역에서도 좀 더 깊이 들어올 거라고 본다. 지금도 윤핵관, 검수완박 등 정치권의 공식 언어에서 줄임말이 새로운 문화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넓게 보자면 전 세계적으로도 줄임말 문화는 하나의 대세로 굳어지는 분위기 아닌가 싶다. CPTPP, IPEF, FOMC 등 도무지 정체를 가늠하기 힘든 국제기구의 로마자 약칭이 국제무대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아무런 거름 장치 없이 그냥 쓰인다. 이런 말들 앞에는 ‘줄임말’이라는 장벽과 ‘외국글자’라는 두 개의 장벽이 서 있다. 서너 개의 외국 단어로 이루어진 이름의 머리글자만 딴 이런 약칭을 앞에 놓고 그 정체를 추측하기란 첩보영화에 나오는 암호 해독 못지않게 어려운 일이다. 신문과 방송에서는 지면이나 화면의 제약, 시간의 제약 때문에 줄일 수 있는 무엇이든 줄이려 한다. 이런 태도는 언론에 주의를 기울이는 공무원이나 기업에도 영향을 준다. 처음에는 온 이름을 쓰고 괄호 속에 로마자 약칭을 병기한 뒤 본문에서는 약칭을 쓰다가, 조금 지나면 처음부터 약칭만 사용한다. 특히 방송 보도가 그렇다. 이런 로마자 약칭 대신 쓸 우리말 약칭이라도 개발해야 하는 게 그나마 공식 언어 영역에서 원활한 소통을 위해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주로 ‘유엔’, 또는 ‘UN’이라고 사용하는 ‘국제연합’을 부를 때 일본에서는 ‘국련’이라고 줄여 부른다. 중국에서는 ‘나토, NATO’라고 우리가 주로 부르는 ‘북대서양조약기구’를 줄여서 ‘북약’이라고 부른다. 우리 언론에서도 미국의 중앙은행에 해당하는 ‘미 연방준비제도’를 ‘FRB, FED’로 쓰는 경우가 있지만, 그래도 요즘은 ‘미 연준’으로 줄여 부르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로마자 약칭으로 부르지 않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처음엔 이상하고 어설퍼 보일 수 있다. 그렇지만 신문과 방송에서 ‘미 연방준비제도’를 언급한 뒤에 ‘미 연준’이라고 말하면 그것이 ‘미 연방준비제도’의 줄임말이라는 것을 쉽게 눈치챌 수 잇고, 그리하여 ‘미 연준’을 들으면 그것이 미국 어떤 연방 기구의 하나라는 추측이 시작되어 그 다음에는 이를 일치시킬 가능성이 훨씬 높아진다. 적어도 ‘아이피이에프(IPEF)’’와 ‘인태경협구상’ 가운데 ‘인도태평양경제협력구상’이라는 온 이름으로 접근해 가는 데에 어느 것이 더 유리할지는 너무나도 자명한 일이다. 줄임말 문화를 거스를 수는 없겠지만, 진정시킬 건 진정시키고 좀 더 모호함을 줄일 수 있는 건 줄이는 게 필요하다. * 이 글은 한글학회 <한글새소식> 6월호에도 실렸습니다.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 작가 서울시와 경기도 국어바르게쓰기위원 국토교통부 철도역명심의위원 역임 저서에 [언어는 인권이다], [한자 신기루]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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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일 : 2023.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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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MC’를 ‘공시위’로 부른다면? 원승연(명지대 경영학과 교수) 미국의 금리가 우리나라 통화정책과 금융시장에 영향을 많이 미치다 보니 언론에서 미국의 정책 변화를 자주 보도한다. 그러면서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를 줄여 부르는 ‘미 연준’이라는 이름은 이미 익숙해졌는데, 최근에는 별다른 설명 없이 에프오엠시(FOMC)라는 이름이 자주 나온다. 금융 전문가에게는 익숙한 것이지만, 정체를 추측할 만한 아무런 실마리가 없어서 일반 국민에게는 암초일 것이다. 이 이름도 ‘미 연준’처럼 우리말로 뭐라고든 줄여 부르면 안 될까? 먼저 ‘FOMC’의 정체부터 살펴보자. 통화정책은 국민 전체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비록 중앙은행이 이를 담당하더라도 다양한 국민의 의견이 반영될 수 있도록 상위의 의사결정기구인 위원회를 두어 결정한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그렇다. 우리나라를 예로 들면 회사의 지배구조에 비유할 때 한국은행이 집행임원과 직원으로 구성된 집행기구라고 한다면 금융통화위원회가 최종 결정을 담당하는, 사외이사 등을 포함한 이사회인 셈이다. 그런데 미국은 연방제 국가라 우리와 많이 다르다. 한국은행과 같은 중앙은행으로서의 집행기구인 연방준비은행(Federal Reserve Bank)이 12개 있으며, 연방정부 내 독립기구로 연방 차원의 통화정책을 집행하는 연방준비이사회(Federal Reserve Board)가 존재하는 연방준비제도(Federal Reserve System)다. 연방준비은행과 연방준비이사회의 기능은 분리돼 있으나, 이 둘을 합쳐서 다른 나라의 중앙은행과 같은 집행기구라고 보면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연준’이라고 지칭하면 연방준비은행, 연방준비이사회, 연방준비제도 중 어느 하나 또는 전체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만약 특정 연방준비은행이나 연방준비이사회를 지칭해야 한다면 ‘뉴욕 연준’ 또는 ‘연준 이사회’처럼 구체적으로 가리켜야 한다. FOMC는 통화정책을 최종 결정하는 미국 연방공개시장위원회(Federal Open Market Committee)의 약칭으로, 이사회에 해당하는 기구다. 우리나라의 금융통화위원회와 유사한 최종 의사결정 회의체 기구다. 넓게 본다면 이 기구도 연방준비제도의 일부이므로 그 행위 주체를 ‘연준’으로 번역할 수도 있지만, 특정 위원회로 지칭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용어 사용은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가령 기준금리를 0.5%로 인하한다면 그 결정은 금융통화위원회가 하지만, 대체로 한국은행이 금리를 인하했다고 표현한다. 최종 의사 결정을 하는 이사회가 나라마다 그 명칭이 달라서 이를 직역할 것인가, 아니면 고유명사로 보아 그 나라의 언어 또는 약칭으로 표현할 것인가 고민스러울 때가 많다. 전문가 처지에서는 괜한 번역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것을 염려해 외국의 원어 명칭을 그대로 쓰는 경우가 많다. 사실 미국 통화정책의 주체를 간단히 ‘미 연준’이라고 표현하면 그만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일부 현학적인 취향의 사람들이 굳이 FOMC를 들먹이는 듯하다. 꼭 써야겠다면 이를 FOMC라고 부를지 아니면 ‘연방공개시장위원회’를 줄여 ‘공시위’처럼 우리말 약칭을 사용할지 선택해야 한다. 내가 보기엔 전문가적 정확성보다 대중의 이해를 중심으로 선택하는 것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전문적 용어가 대중화 될 때에는 일반인이 이를 쉽게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약칭 표현은 경제학자보다는 국어학자나 우리말과 글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올바른 용어를 고민해서 결정해야 할 일인 듯하다. 경제학자로서는 FOMC를 표현하는 국어의 규범이 정해진다면 이를 전폭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리라. * 이 글은 서울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출처: 미국 연방공개시장위원회 공식 누리집) 원승연 명지대학교 경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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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자 : 원승연
- 등록일 : 2023.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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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쉬운 우리 새말] 자체 제작물, 오리지널 콘텐츠 김정희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 오늘 살펴볼 말은 ‘오리지널 콘텐츠’(original contents)다. 인터넷동영상서비스(오티티)나 전자책 서점 등에서 자체적으로 만들어 공개하는 제작물을 가리킨다. 연원을 따져 보면 지금부터 무려 20년 전인 2002년 처음 우리 언론에 등장해 지금까지 5만번이 넘게 쓰인 표현이다. 처음 디지털타임스에 이 표현이 나타났을 때는 ‘원 소스 멀티 유즈’(One Source, Multi-Use)라는 개념을 소개하기 위해서였다. 웹, 모바일, 디지털 티브이 등 여러 매체를 통해 다양하게 유통(멀티 유즈)할 수 있는 하나의 원천 제작물(원 소스)을 가리키는 게 바로 ‘오리지널 콘텐츠’였다. 이후 수입 영상물을 주로 방영하던 국내 위성방송, 케이블 방송에서 수입품이 아닌 ‘자체 제작 국산 프로그램’을 만들어 선보이기 시작할 때도 이를 ‘오리지널 콘텐츠’라고 표현했다. 요즘 이 표현을 워낙 자주 사용하다 보니 언론에서 다룰 때도 우리말 풀이를 덧붙여 주지 않는 편이다. 대신 ‘자체 제작한 오리지널 콘텐츠’라는 식으로 쓰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알고 보면 ‘콘텐츠’는 꽤 까다로운 단어다. 사실 영어 콘텐트(content)는 원래 ‘내용/내용물’ 일반을 두루 가리키는 단어다. 그런데 1990년대 말 이른바 닷컴 시대가 오면서 ‘각종 유무선 통신망을 통해 제공되는 디지털 정보’를 특정하는 말로 쓰이게 된 것이다. ‘콘텐트’에 복수형을 나타내는 ‘s’를 붙인 것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도 있다. 실제로 영어권에서는 ‘오리지널 콘텐츠’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구글 영문판에서 ‘original contents’를 입력하면 자동으로 수정되어 ‘original content’만 검색된다. ‘오리지널 콘텐트’가 올바른 표현인 것이다. 어째서일까. 여기서 의미하는 콘텐트는 불가산(不可算) 명사, 즉 한 개, 두 개라는 식으로 셀 수가 없는 명사이기 때문이다. 복수형으로 쓰이는 ‘콘텐츠’라고 하면 ‘용기 안에 들어 있는 (셀 수 있는) 내용물들’이라거나 ‘(책의) 목차’를 일컬을 때 사용된다. 혹은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나온 것처럼 ‘만족스러운 상태’를 뜻하기도 한다(‘content’에는 ‘만족하다’, ‘만족스럽다’는 의미도 있다). 어쨌거나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콘텐츠’로 굳어 버린 이 단어는 우리말로 다듬는 것도 만만치 않은 까다로운 외국어다. 디지털 제작물로서 ‘콘텐츠’를 바꿔 쓸 적절한 우리말이 찾아지지 않는 바람에 아직도 웬만한 다듬은 말에 ‘콘텐츠’라는 형태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콘텐츠 리터러시’를 ‘콘텐츠 문해력’ 혹은 ‘콘텐츠 이해’로 다듬은 것이 그 예다. 하지만 이번에 살펴본 ‘오리지널 콘텐츠’는 그간 대체물을 찾지 못해 ‘콘텐츠’라는 단어를 벗어날 수 없었던 것과 달리 비교적 쉽게 다듬은 말을 마련할 수 있었다. 바로 그간 언론에서도 많이 사용해 온 ‘자체 제작물’ 혹은 ‘자체 제작한 작품’이라는 표현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애초 ‘오리지널 콘텐츠’가 사용됐던 ‘원 소스 멀티 유즈’의 맥락에서는 대체하기 어려운 표현이긴 하겠으나,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의미에서는 잘 맞는 표현이라 하겠다. 새말모임에서는 ‘자체 제작물’ 외에도 ‘고유 제작물’이란 말을 후보로 올렸는데, 국민수용도 조사 결과 ‘자체 제작물’이 무려 89.5%라는 높은 지지율로 최종 다듬은 말로 결정됐다. 그간 ‘콘텐츠라는 단어를 대체할 말은 없다’고 생각했던 고정관념을 깼다는 점에서도 값진 성과였다. ※ 새말모임은 어려운 외래 새말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지기 전에 일반 국민이 이해하기 쉬운 말로 다듬어 국민에게 제공하기 위해 국어, 언론, 통번역, 문학, 정보통신, 보건 등 여러 분야 사람들로 구성된 위원회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국어원이 모임을 꾸리고 있다. 김정희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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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 등록자 : 김정희
- 등록일 : 2023.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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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쉬운 우리 새말] 하락 전환과 피크 아웃 김정희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 어려운 외국어 신조어를 우리말로 다듬는 새말 모임의 성과물을 이 지면에 소개한 지 어느덧 1년이 돼 간다. 그간 스무 개가 조금 넘는 우리말을 이 지면을 통해 선보였다. 그런데 이번처럼 언론에서 우리말 설명을 각양각색으로 덧붙인 외국어는 없었던 것 같다. 그만큼 많이 쓰이고는 있으되 우리말로 표현하기는 까다로운 용어라는 얘기다. ‘피크 아웃’(Peak Out)이 주인공이다. ‘피크 아웃’이란 고점(peak)을 찍은 뒤 빠져나온다(out)는 뜻으로, 경기나 주식이 최고점을 찍고 하락 국면에 접어드는 상황을 일컫는다. 영어의 뜻 자체만으로는 경기나 주식 등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몸 상태나 운동 기량 등 여러 방면에서 최고 상태를 기록하고 내리막에 막 접어드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경제 용어로만 사용되는 편이다. 반대말은 ‘보텀 아웃’(bottom out). 흔히 ‘바닥을 쳤다’는 식으로 풀이되는 말이다. ‘피크 아웃’이 우리 언론에 처음 쓰인 시기는 2000년으로 해당 기사는 다음과 같다. “경기 주도 업종의 재고순환으로 볼 때 경기는 이미 정점에서 내려가고(Peak-Out) 있으며 늦어도 3분기 중에는 피크 아웃할 것으로 예상된다.”(머니투데이 2000년 8월) 우리말 설명 뒤에 영문으로 ‘peak-out’이라는 표현을 괄호 속에 제시하고, 다시 문장 뒤에서 우리말 발음을 반복해 배치한 셈이다. 이후 20년 동안 주로 경제지나 종합일간지 경제면에서만 주로 쓰였는데도 검색 수가 무려 5만번이 넘었으니 실로 많이 쓰이기는 했지만, 정착된 우리말 순화어는 없다. 그래서인지 앞서 말한 것처럼 정말 다양한 우리말 설명이 붙었다. ‘정점 통과 후 하락’, ‘고점 대비 하락’, ‘고점을 치고 둔화되는 것’, ‘정점을 지나는 것’, ‘고점을 친 것’, ‘하강 기미를 보이는 것’, ‘최고 시세까지 올라 더이상 오르지 못함’, ‘고점 후 하락세 돌입’ 등등. 가만 살펴보면 우리말 설명에 따라 미묘한 차이가 있다. ‘기업 이익이 정점이라는 피크 아웃’(연합인포맥스 2009년 10월), ‘정점에 이르고 있는 피크 아웃 상황’(뉴스토마토 2022년 11월)은 정점에 올랐다는 상황을 주로 강조하고 아직 하강 국면에 접어들지 않은 것처럼 표현한 설명이다. 그런가 하면 ‘추진력이 떨어지는 피크 아웃’(머니투데이 2010년 9월) 식으로 정점에 대한 언급 없이 하락 국면만 강조하는 표현도 있다. 한 개 혹은 두 개 단어로 이뤄진 우리말 표현만 살펴보아도 여러 가지 조합이 뒤섞여있다. ‘고점 도달’, ‘경기 정점’, ‘정점(고점) 통과’, ‘하락 전환’, ‘고점 후 하락’ 등이 그것이다. 한편 “반도체 업황의 고점(peak out) 우려”처럼 아예 한 단어로 대체한 경우(한국경제TV 2018년 7월)도 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고점’ 혹은 ‘정점’ 같은 표현은 ‘벗어났다’는 뜻을 포함하지 않기 때문에 다소 부적절한 쓰임으로 봐야 할 것이다. 새말모임 위원들도 ‘피크 아웃’이라는 용어가 품고 있는 여러 상황 중 어떤 성격을 강조할 것인가 고심한 끝에 ‘고점을 지났다’는 상태를 나타낸 ‘고점 통과’와 ‘탈정점’, 그리고 ‘내리막이 시작됐다’는 상황을 강조한 ‘하락 전환’이라는 세 개의 말을 후보로 정했다. 굳이 용어가 아니라도 ‘정점을 찍고 내리막이 시작됐다’는 문장으로 풀어 써 주는 것이 말 자체도 쉽고 뜻을 전달하는 데도 유리하다는 의견이 있었으나, 용어로서 다듬은 말의 실제 쓰임을 고려할 때 간결성도 중요하기 때문에 아쉬우나마 명사형 단어 조합을 찾아낸 것이다. 여론조사 결과 시민들은 ‘하락 전환’에 80%가 넘는 지지를 함으로써 이 같은 시도에 호응했다. ※ 새말모임은 어려운 외래 새말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지기 전에 일반 국민이 이해하기 쉬운 말로 다듬어 국민에게 제공하기 위해 국어, 언론, 통번역, 문학, 정보통신, 보건 등 여러 분야 사람들로 구성된 위원회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국어원이 모임을 꾸리고 있다. 김정희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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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자 : 김정희
- 등록일 : 2023.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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