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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셔츠, 니스란 말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소준섭(전 국회도서관 조사관, 국제관계학 박사) 우리가 평소 입고 다니는 ‘와이셔츠’라는 명칭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영어 Y 자 모양이라서 그렇지 않겠냐는 대답이 돌아오곤 한다. 하지만 그것도 확신을 하고서 하는 대답이 아니다. 정답은 일본식 영어와 관련이 있다. 일본에서 영어 white shirt의 앞 글자 white를 ‘와이’로 읽어 ‘와이셔츠’라는 이름이 만들어졌고 이 말이 그대로 한국에 들어왔다. 아마 열에 아홉 명은 ‘와이셔츠’에 얽힌 이러한 곡절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너무나 어이가 없는 명칭이다. 우리가 마룻바닥 등에 광택을 내기 위해 칠하는 ‘니스’라는 명칭 역시 마찬가지다. varnish라는 영어의 앞과 뒤를 모두 떼어내고 중간 발음만 내서 ‘니스’라는 명칭이 생겨난 것이다. 일본이 자기들 멋대로 만들어낸 일본식 영어다. 일본인들은 이러한 일본식 영어를 화제(和製, 중국이 자신들을 스스로 화(華)라고 부르듯, 일본은 스스로 화(和)라고 부른다.) 영어라고 부른다. 그리고 우리는 그 엉터리 영어들이 일본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혹은 우리가 만들어낸 ‘콩글리시’라고 생각하면서 사용하고 있다. 티브이(TV)를 보면 ‘텐션’이니 ‘하이텐션’과 같은 자막이 계속 나온다. 이러한 말들도 일본식 영어다. 영어 high tension은 ‘고압’, ‘고전압’이란 의미다. 그래서 일본식 영어 ‘하이텐션’을 사용한 “You are high tension.”이란 문장은 ”“너는 고전압이구나.”라는 엉터리 영어가 되고 만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무심코 사용하는 “매너가 없다”의 ‘매너, manner’라는 영어에는 원래 우리가 사용하는 ‘예의’라는 뜻이 없다. 또 “센스가 있네”라는 말의 ‘센스, sense’에는 우리가 사용하는 ‘감각’이란 의미가 없다. ‘매너’나 ‘센스’라는 말 역시 일본이 마음대로 만들어낸 일본식 영어다. 그림 1. 한국에서 사용하는 외국어 중에도 일본식 영어가 꽤 많다. 물론 모든 외국어를 거부할 수는 없다. 특히 지금과 같은 국제화 시대에, 일정한 수준의 영어 사용이 불가피한 경우가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에서 영어 가 지나치게 남용되고 있으며, 더구나 우리가 사용하는 그 영어의 대부분이 엉터리 일본식 영어라는 점은 우리가 깊이 성찰해야 할 대목이다. 국가 차원에서 잘못된 일본식 영어를 바로잡아야 한다 근대 이래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 국가가 된다’는 의미의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지향해온 일본은 서구화를 지향하면서 일상 대화에서 영어를 사용하는 것이 보편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화제 영어’라 하여 자기들 방식의 영어도 많이 만들어왔다. 하지만 지나치게 자의적으로 용어를 만들어냄으로써 결국 국제사회에서 올바른 의미로 통용될 수 없는 영어를 양산하였다. 우리는 이제껏 일본이 만든 그런 ‘비정상적인’ 용어들을 비판 없이 받아들여 아무런 의식도 없이 사용해왔다. 우리가 크게 반성하고 성찰해야 할 부분이다. 물론 그러한 용어들이 우리 사회에서 일반화된 채 통용되고 있다는 언어의 사회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이제 선진국 대열에 진입한 만큼, 왜곡된 의미를 주는 말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여 쓸 게 아니라 소통에 걸맞은 올바른 언어를 사용해야 바람직하다. 그림 2. 한국어의 자존감을 드높이기 위해, 국가 차원의 정책이 필요하다. 더구나 우리는 세계적으로 우수성이 입증된 한글이라는 뛰어난 문자를 가진 민족이다. 이제 언어에서도 자존감을 드높일 때다. 비록 짧은 시간 내에 바꾸기 어렵다고 할지라도 지금부터라도 잘못 사용되고 있는 용어들을 꾸준히 바로잡아가는 국가 차원의 정책이 필요할 때다. 소준섭 전 국회도서관 조사관, 국제관계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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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일 : 2021.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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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랫폼, 연결망 시대의 연결터 또는 이음터 정태석(전북대) 인터넷이 공기가 되어버린 시대에 갑작스러운 접속의 끊김은 사람들에게 대혼란을 안겨 준다. 특히 코로나 대유행으로 비대면 수업을 듣고 비대면 시험을 보아야 하는 시대에, 접속 불량이나 접속 끊김은 학생들의 새로운 불안 거리가 되었다. 시험을 보다가 갑자기 인터넷이 먹통 되면 당혹스러움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가 된다. 물론 불안은 학생들만의 몫이 아니다. 인터넷 연결망(network)을 통해 각종 정보를 주고받아야 작업을 하거나 영업을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도 불안 거리이긴 마찬가지이다. 갑자기 공기가 사라져 숨을 쉴 수 없게 된 것처럼 답답함을 느끼게 된다. 이처럼 대부분 사람이 휴대전화 단말기로 접속하는 인터넷 환경을 당연하게 여기고 살아가는 시대가 되면서,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나 서로 연결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일상적인 연결과 접속의 시대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사람들을 잇는 가상현실의 연결 공간들 가운데, 특정한 목적으로 서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연결해줌으로써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모여들게 된 공간들은 언제부턴가 플랫폼(flatform)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그림 1. 플랫폼의 가장 익숙한 용법은 기차역 승강장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영어에서 플랫폼은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용법은 기차역 승강장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영어에서 플랫(flat)은 평평하다는 의미이고, 폼(form)은 모양새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기차에서 오르내리는 평평한 모양의 승강장을 플랫폼이라 부른다. 한편 이런 평평한 기반은 어느 컴퓨터에서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작동하게 하는 공통의 기초라는 인상을 주기도 하는데, 이때 운영체제로서의 플랫폼은 ‘공통운영기반’으로 번역할 수 있겠다. 한편 게임산업 분야에서는 개인용 컴퓨터에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이동식 단말기, 게임용 기기에서도 작동하여 어디에서나 어느 기기를 통해서도 똑같은 게임에 접속하여 즐길 수 있도록 지원하는 단계로 나아가고 있는데, 이것을 멀티 플랫폼이라 부른다. 이것은 좀 길지만, 다중 공통운영기반으로 번역할 수 있겠다. 공통운영기반과 유사한 의미의 플랫폼이라는 용어는 물론 컴퓨터에서만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자동차 회사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차량이 공유하는 기본 골격을 플랫폼이라 부른다. 공통의 설계를 통해 차바퀴와 차체를 연결하는 현가장치(서스펜션), 주행 방향을 조작하는 조향장치(스티어링), 원동기(엔진)의 동력을 차바퀴에까지 전달하는 동력전달장치(파워트레인) 등 다양한 부품들을 공유하게 되면, 약간의 변형을 통해 다양한 모형의 자동차를 개발할 수 있고 기술적 완성도도 높일 수 있어서 시간과 비용을 절약하면서도 좋은 품질의 자동차를 생산할 수 있게 된다. 회사마다 공유의 범위나 방식은 달라질 수 있지만, 이렇게 공통의 설계를 통해 플랫폼을 갖추면 자동차 생산에서 다양한 이점을 누릴 수 있는데, 이때 플랫폼은 자동차 생산의 ‘공유작업기반’이나 ‘공통작업기반’으로 부를 수 있겠다. 좀 줄여서 부른다면 ‘공유틀’이나 ‘공통틀’이라는 표현도 가능하다. 한편 오늘날 점점 널리 퍼지고 있는 플랫폼의 용법은 플랫폼 기업, 플랫폼 노동, 플랫폼 자본주의와 같은 것들이다. 여기서 플랫폼은 인터넷으로 연결된 가상공간이라는 뜻인데, 플랫폼 기업은 가상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연결 활동을 중요한 이윤 획득의 기반으로 삼고 있지만, 플랫폼 노동은 앱을 통해 가상공간에서 연결되는 거래를 현실 공간에서 실현하는 활동이다. 그리고 플랫폼 자본주의는 플랫폼을 이용한 경제활동이 사회적으로 확산되는 자본주의를 일컫는 말이다. 그림 2. 인터넷의 가상공간으로서 플랫폼은 사람들을 서로 연결하는 공간이다. 사람들은 플랫폼에서 서로 소통하려는 개인과 개인, 사업자와 사업자, 판매자와 구매자 등 다양한 방식으로 만날 수 있다. 카카오톡, 네이버밴드,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텔레그램 등은 다양한 욕구를 지닌 개인들을 필요에 맞춰 서로 이어주는 장치들이 된다. 각종 음식 배달 앱들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가상공간에서 음식 판매업체들을 모아 홍보하는 동시에 소비자들의 이용을 유도하게 되면 판매자와 소비자의 규모가 점점 커지게 되는데, 소비자들이 원하는 업체를 찾아 편리하게 주문할 수 있는 앱을 개발하고 개선해나가면, 이 공간은 하나의 거대한 플랫폼이 된다. 카카오택시나 네이버택시는 택시 플랫폼의 또 다른 형성 사례를 보여준다. 그들은 누리소통망(SNS), 관문(포털) 서비스, 전자우편 서비스 등을 통해 이용자들을 모으고 지도검색 및 운전 안내 서비스를 제공한 후, 이들이 택시 운전자와 승객으로 서로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가상공간과 앱을 무료로 제공하기 시작했다. 이 앱을 이용하는 택시 운전자와 승객이 늘어나면서 택시 이용이 서로 편리해지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앱이 없으면 택시를 이용하기가 불편해질 정도로 거대한 택시 플랫폼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플랫폼들은 마치 기차역 승강장이 가상공간으로 옮겨진 듯하다. 기차역 플랫폼에서는 이곳저곳에서 온 기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또 다른 곳으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편리하게 옮겨 다닐 수 있다. 그래서 평평한 공간으로 만들어놓았다. 이처럼 서로 다른 출발지에서 온 기차 승객들이 서로 다른 목적지로 가는 기차로 옮겨 탈 수 있도록 서로 이어주는 곳이 기차역 플랫폼의 중요한 기능이다. 이것은 가상공간에서 곳곳의 판매자들과 곳곳의 구매자들, 곳곳의 택시 운전자들과 곳곳의 승객들을 서로 이어주는 모습과 흡사하다. 그래서 인터넷의 가상공간으로서 플랫폼은 사람들을 서로 연결하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플랫폼을 한글문화연대에서는 ‘이음마당’, 국어원에서는 ‘거래터’라는 말로 대체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그런데 플랫폼 노동이나 플랫폼 기업을 이음마당 노동, 이음마당 기업으로 부르는 것은 좀 어색하며, 거래터로 부르는 것도 단지 거래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 사용이 제한적이다. 주변의 의견을 들어보면, 기능의 측면에서는 연결, 이음, 연계, 중계, 거래라는 의미를, 공간의 측면에서는 터, 장, 마당, 창구라는 의미를 떠올리는데, 이들 중에서 ‘연결’이나 ‘이음’과 ‘터’를 결합한 말이 좀 덜 어색하다고 느끼는 것 같다. 그래서 다양한 사람들을 서로 이어준다는 의미에서 ‘연결터’, ‘이음터’ 등의 표현을 쓰는 것이 일반 대중들에게도 의미를 전달하기가 좀 쉽겠다는 생각이 든다. 플랫폼처럼 세 음절이라는 점에서 발음이 덜 어색해 보이기도 한다. 지금 플랫폼이라는 표현이 그 의미가 모호한 가운데 이미 다양하게 널리 사용되고 있어서, 쉽지 않은 말의 주도권 다툼이 벌어지겠지만 이제 ‘연결터/이음터 노동’, ‘연결터/이음터 기업’, ‘연결터/이음터 자본주의’라는 표현을 플랫폼의 대안으로 적극적으로 사용해보면 좋을 듯하다. 일상에서 사람들이 편하게 사용하면서 많은 사람의 입에 붙으면 좀 더 널리 통용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정태석 전북대학교 사범대 일반사회교육과 교수 비판사회학회 <경제와사회> 편집위원, 한국환경사회학회 감사,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 부소장 역임 저서로 “시민사회의 다원적 적대들과 민주주의”, “행복의 사회학”, “한국인의 에너지, 평등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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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자 : 정태석
- 등록일 : 2021.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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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싱크홀’의 제목이 ‘땅꺼짐’이었다면? 최형용 /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외래어나 외국어를 우리말로 바꾸자는 주장에 외래어나 외국어를 우리말로 바꾸면 원래 의미가 잘 와닿지 않는다는 이유를 대는 일을 흔히 접하곤 한다. 그러나 ‘텔레비전’과 ‘전화’를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전화’도 우리 고유어는 아닐 뿐만 아니라 근대 문물의 수용 과정에서 우리의 주체성이 발현된 경우도 아니므로 적당한 예가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텔레폰’이 아니어서 그 의미가 잘 와닿지 않는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를 보면 외래어나 외국어를 우리말로 바꾸는 순화 작업(순화 작업의 결과물인 ‘순화어’를 더 쉽게 ‘다듬은 말’이라고 하기도 한다. 즉 ‘다듬은 말’은 ‘순화어’를 ‘다듬은’ 말이기도 하다.)은 순화어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말을 꾸준히 사용하는 데 성패가 달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말을 직접 사용하는 언중의 선택을 받아야 한다는 점이다. 결국 잘 만들어낸 순화어도 언중들의 선택을 받지 못하면 정착할 수 없어 생명력이 다하는 것이다. 따라서 언중들이 다듬은 말을 잘 선택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널리 알리는 일은 다듬은 말의 정착 여부를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에 개봉한 영화 ‘싱크홀’은 이러한 점에서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비전문가라 작품의 내용에 대한 평가는 어렵지만, 이 영화는 200만 명 이상이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한 것으로 보도된 바 있다. 코로나19 상황의 위중성을 생각한다면 이 정도의 수치는 흥행 성적표로는 매우 훌륭하다는 데 이견이 없을 것 같다. 그림 1. 영화 ‘싱크홀’ 홍보물 우리의 관심은 외래어나 외국어의 순화이므로 이러한 관점에서 영화를 살펴보자면, 특정 지역이 어느 날 갑자기 땅 밑으로 꺼지는 현상을 ‘싱크홀’로 표기하여 제목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 관심이 간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영화 속에서 이를 속보로 보도하는 뉴스 장면에서는 ‘싱크홀’이 아니라 ‘땅꺼짐’으로 보도하였는데, 이 장면에 주목한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았을 듯싶다. 이는 곧 언론에서는 ‘싱크홀’을 ‘땅꺼짐’으로 순화하여 사용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제목이 노출된 정도에 비할 수 없이 순화어가 노출된 찰나의 순간을 보며 현재 우리의 다듬은 말 정비 사업이 이러한 비대칭적 상황에 놓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떨쳐 버리기 어려웠다. 지금 이 순간에도 국립국어원을 비롯한 많은 유관 단체들에서 외래어나 외국어 순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전문가의 손에서 탄생한 순화어는 그 자체로는 아직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없다.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일차적으로 전문가의 손에서 탄생한 순화어는 일반 언중들이 사용하면서 비로소 온전한 생명력을 가지게 된다. 사실 이 과정에서 웃지 못할 일들이 생기기도 했다. 과거의 일이기는 하지만 일반 언중들이 선택하여 탄생한 순화어들이 정작 일반 언중들의 외면으로 정착하지 못한 경우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핫팬츠’에 대한 순화어로 선정된 ‘한뼘바지’가 이의 대표적인 예가 아닐까 한다. ‘한뼘바지’는 언중의 관심을 끄는 데는 성공했지만 널리 쓰이기에 알맞은 조건을 충족시키지는 못한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300개 정도의 순화한 말들 가운데 《요긴하게 쓸 만한 다듬은 말 61개》에 ‘한뼘바지’가 들지 못했다는 사실은 이러한 점에서 의미하는 바 크다. ‘USB메모리’를 ‘정보막대’로 순화한 것도 언중들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이제는 ‘막대’ 모양이 아닌 ‘USB메모리’가 적지 않아 ‘정보막대’라는 다듬은 말을 쓰기 어려운 상황이 된 것은 아이러니하기까지 하다. ‘인터넷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즐기는 노년층’의 의미인 ‘웹버족’에는 ‘실버’가 들어가는데 이를 축자적으로 반영하여 ‘은빛누리꾼’이라고 바꾼 것도 역시 선택을 받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 우리말에서 ‘은빛’은 아직 ‘노년층’을 의미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간과하였기 때문이다. 그림 2. 다듬은 말 중에서도 언중의 선택을 받은 말이 살아남는다. 이들에 비하면 ‘싱크홀’을 다듬은 말인 ‘땅꺼짐’은 잘 만들어진 것이면서 잘 정착할 수 있는 요건을 갖추었다고 판단된다. 원말에 ‘홀’이 뒤에 있으니 ‘꺼진구멍’처럼 축자적으로 바꾸는 것도 가능하지만, “싱크홀 현상이 발생했다.”처럼 쓰이는 경우 ‘싱크홀 현상’을 ‘꺼진구멍 현상’으로 바꾸어 쓰는 것은 어색하다. 따라서 ‘꺼진구멍’보다 ‘땅꺼짐’이 더 낫다고 할 수 있다. ‘싱크홀’이나 ‘꺼진구멍’에는 꺼진 대상인 ‘땅’이 드러나 있지 않다는 점에서 이를 드러낸 ‘땅꺼짐’이 의미 전달의 측면에서도 유리한 측면이 있어 보인다. 무엇보다 ‘싱크홀’과 비슷하면서도 차이가 나는 ‘포트홀(pothole)’을, ‘땅꺼짐’을 참조하여 ‘땅파임’로 순화한 것도 서로 짝이 맞아 오히려 원어보다 좋은 것 같다. 물론 그 의미를 더욱더 잘 전달하기 위해 ‘땅꺼짐’의 ‘땅’ 대신 ‘도로’로 바꾸는 정도는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림 3. 땅꺼짐(싱크홀)의 모습 그림 4. 땅파임(포트홀)의 모습 앞서 순화어의 성패가 정착에 달려 있다고 강조하였는데 사실 ‘땅꺼짐’은 그 나름대로 사용 빈도가 높은 순화어에 해당한다. 그러나 만약 200만 명 이상이 관람한 영화 제목 ‘싱크홀’이 ‘땅꺼짐’이었다면 어땠을까? 다른 것은 모르겠지만 ‘땅꺼짐’이라는 순화어를 정착시키는 데 이보다 더 큰 홍보 효과를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가장 좋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질문을 바꾸어 영화의 제목을 ‘싱크홀’이 아니라 ‘땅꺼짐’이라고 했다면 관객 수에 영향이 있었을까? 너무 이상적이라는 평가를 피하기 어렵겠지만 이렇게 영화 제목을 바꾸었을 때 더 많은 관객이 찾는 날이 왔으면 하는 작은 바람을 가져 본다. 그러기 위해서는 점점 더 많이 쏟아지는 외래어나 외국어를 다듬는 과정에서부터 ‘정착’을 염두에 두는 발상의 전환이 어느 때보다도 절실히 필요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최형용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학술지 <형태론> 편집 위원, 이화여자대학교 국어문화원 원장, 국방부 정책자문위원 역임. 저서로 “사잇소리 현상과 사이시옷 표기에 대한 계량적 연구”, “한국어 형태론”, “정확한 화법과 미디어 언어 분석”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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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자 : 최형용
- 등록일 : 2021.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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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깐부' 맺은 영어 남용 이건범 / 한글문화연대 대표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 작가, 서울시와 경기도 국어바르게쓰기위원, 국토교통부 철도역명심의위원 역임 저서에 <언어는 인권이다>, <한자 신기루> 등 전 세계 시청률 1위를 차지한 ‘오징어 게임’에서 나온 ‘깐부’라는 단어가 화제다. 깐부는 딱지치기, 구슬치기를 할 때 한 편이나 동지를 뜻하는 은어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최근 만난 여러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추정해 보면 일본어 ‘가부시키’(かぶしき·株式)의 ‘가부’가 변한 말일 가능성이 크다. ‘가부’는 과거 일본의 도매상인들 동업조합을 부르는 말이었고, 투자한 지분만큼 얻는 권리를 ‘가부시키’라고 칭했다. ‘가부’는 일종의 경제공동체를 뜻하는 말이다. 여러 지역에서 어릴 적 “가부 맺자”, “가부하자”, “가부 걸자”고 썼던 일본어가 세월이 흘러 ‘깐부’라는 말로 변해서 다시 등장했다는 얘기다. 말소리의 유사성으로 볼 때 설득력이 있다. 비탈을 뜻하는 고바이가 ‘코우바이(勾配·こうばい)’라는 일본말의 찌꺼기인 것처럼 말이다. 한류 절정 드라마에 웬 일본말 찌꺼기냐 싶지만, 우리 살아온 형편이 그렇다. 드라마 제목인 ‘오징어 게임’은 어떤 동네에서는 ‘오징어 가이생’이라고 불렀다. 이 이름은 ‘싸움을 시작한다’는 뜻의 일본어 ‘가이생’(開戰개전)에서 왔던 말이었다. 놀이마저 일본 것은 아닐까 걱정했지만, 여러 자료에서 ‘오징어 놀이’를 민속놀이로 소개하고 있어 천만다행이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에서는 일제강점기에 ‘가이생’이라고 부르던 습관이 한동안 이어졌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림1. 오징어게임 '우린 깐부잖아' 장면. (출처: 넷플릭스 오징어게임) ‘한패’, ‘한편’ 대신 일본어 ‘가부’를, ‘놀이’ 대신 일본어 ‘가이생’을 쓰던 우리 문화가 이제 한류라는 이름으로 세계를 휩쓸고 있다. 놀랍고 칭송할 만한 일이다. 그 과정에서 ‘가부’가 ‘깐부’가 되고 ‘가이생’이 영어 ‘게임’으로 변한 이 뒤섞임이 문화 현상으로서는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그런 말들의 유입과 변화에 담긴 슬픈 역사가 떠올라 그저 마뜩지만은 않다. 그것이 어찌 자유롭고 평등한 문화 교류였겠는가. 한류와 국뽕 때문에 이제 우리는 일본을 넘어섰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일본이 우리에게 알게 모르게 미친 영향이 얼마나 큰지 놀랄 때가 많다. 언론과 공공기관, 기업에서 쓰는 영어도 대개 일본에서 쓰는 걸 따라 한다는 사실은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전국 지자체에서 그렇게도 무수히 벌이는 각종 ‘챌린지’, 기계에다 사용하던 말을 사람에게 적용한 ‘스펙’, 고위 공직자들도 자주 사용하는 ‘스케일업’, 말로만 수준을 올려버리는 ‘레벨업’ 등 영어의 원래 의미와도 다르게 일본이 자기네 편의대로 만들거나 의미를 붙여 사용하는 일본식 영어가 정말 많다. 국제관계학 박사 소준섭의 분석에 따르면 이런 식으로 일본에서 쓰던 대로 우리가 따라 쓴 영어 단어는 테이크아웃, 스킨십, 에스엔에스, 프로듀서, 베드타운, 패널, 아메리카노, 원룸, 콜라보, 매너모드, 플러스알파, 셀럽, 에코백, 체크포인트, 스킬업, 파워업, 마이너스 성장, 인프라, 해프닝, 헬스센터 등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제2차 세계대전 패망 이후 미국의 지배가 미친 영향인지 세계화 욕망 탓인지, 메이지 유신 시절 서양의 문물과 개념을 번역하던 그 도전적인 창의력은 어디 가고 오늘날 일본 사람들은 영어 단어 쓰길 좋아한다. 신기하게도 이런 쪼가리 영어를 우리 언론과 공무원들도 그대로 가져다 쓴다. 일본이 쓰는 영어라면 우리 또한 써도 된다는 ‘깐부’라도 맺은 것일까? 영어를 공용어로 삼자는 주장도 일본에서 먼저 일어난 걸 따라 했다. 우리는 많은 면에서 일본을 벗어났지만, 어떤 건 여전히 일본을 따라 한다. 그중에서도 하필이면 영어 남용을 따라 한다니, 이 얼마나 창피한 일인가. 이 글은 이데일리에 기고문으로 실렸음을 밝힙니다. (2021년 10월 21일) https://www.edaily.co.kr/news/read?newsId=01203766629215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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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자 : 이건범
- 등록일 : 2021.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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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자 : 소준섭
- 등록일 : 2021.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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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가용 대신 메타버스 타고 오는 의사 선생님 최보기 / 작가, 서평가 최보기 관악구청 청년정책과 구로구청 구정연구관 ‘최보기의 책보기’ 연재 서평가 저서 『거금도 연가』, 『놓치기 아까운 젊은 날의 책들』, 『박사성이 죽었다』, 『독한시간』 #1 백두군 군청 대회의실에 군수를 비롯한 과장급 이상 간부들이 모였다. 곧이어 ‘백두군 웰빙시티 중장기 마스터플랜 수립 용역 최종 브리핑’이 있을 예정이다. 보고서 주요 내용은 ‘백두군 웰빙시티 비전, 목표, 중장기 로드맵’이고 용역 수행 기관은 ㈜*** 테크놀러지스다. 화려한 컬러 인쇄로 80쪽에 달하는 보고서는 그 색깔만큼이나 외국어 일색인 전문용어와 기술용어가 현란하게 채우고 있다. 용역 예산이 억 단위라서 그런지 ‘백두군 복지도시 중장기 기본계획 수립 용역 최종 보고회’와는 차원이 다르다. 잠시 후 회의실 불이 꺼지자 빔 프로젝터로 발사한 파워포인트 문서가 정면에 뜨고, 용역회사 대표가 마치 훈련된 조교처럼 빠른 말투로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한다. 시작하는 문장에 외국어가 벌써 3개지만 나 역시 저 외국어들을 어떻게 쉬운 우리말로 바꿔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지금 어려운 외국어 대신 쉬운 우리말 쓰기를 특정 개인의 역량에 맡기거나 강요하기 어렵다는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설마 용역회사 대표가 ‘공무원들은 전문용어에 약하니까 전문용어로 가득한 보고서를 만들어 가야 군수님 앞에서 엉뚱한 소리를 못 할거야.’라고 판단해 보고서를 일부러 어렵게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오해하는 사람도 가끔 있다. 그림 1. 웰빙시티 마스터플랜과 복지도시 중장기 기본계획은 차원이 다르다. 방대한 내용을 압축한 보고가 끝나고 질의응답 시간이다. 참석자도 용역회사 대표도 이미 예상했듯 특별한 질문 없이 묵직하고 어색한 침묵이 회의실을 채운다. ‘이렇게 질문이 하나도 없으면 곤란한데….’란 생각을 서로 하는 사이 회의 주재자인 군수가 운을 뗐다. - 거, 내용이 굉장히 복잡하고 많은데 어쨌든 우리 백두군이 살기 좋은 복지도시가 되기 위해 필요한 정책들은 다 담고 있는 거죠? - 네, 모두 담고 있습니다. 뒤이어 정책 실무를 총괄하는 부군수나 보좌관의 몇 가지 질문 뒤에 ‘국과장님들 질문할 것 없습니까?’ 질문에 침묵이 5초 이상 이어지면 회의는 끝나고, 용역은 성공적으로 진행될 것이다. 여기에 오해가 한 가지 있다. 군청 과장급 이상 공무원이면 수십 년 공직생활 동안 이 업무, 저 업무 안 해본 업무가 없다. 대부분 눈치만으로도 핵심을 가릴 줄 안다. 보고서 용어와 내용이 어렵거나 질문할 것이 없어서 그들이 침묵하는 것이 아니다. 침묵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보고서를 외국어와 전문용어 범벅으로 어렵게 작성하지 말고 쉬운 우리말로 쉽게 작성하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그들 중 일부는 이미 하고 있었으나 회의 자리에서 말을 안 할 뿐이다. 공무원들은 공개 회의 자리에서 자기 담당 국, 과, 팀 업무와 관련된 내용이 아니면 가급적 말을 아낀다. 괜한 말을 했다가, 설마 그게 해당 부처를 칭찬하는 내용일지라도 회의가 끝난 후 쓸데없는 오해와 시비를 부르기 때문이다. 용역기관 대표에게 ‘보고서를 쉬운 말로 작성하면 좋겠다.’라는 상식적인 의견을 내도 용역 발주 담당 국과장이 들을 때는 ‘지금 군수님 앞에서 나보고 일 똑바로 하라고 엿 먹이는 소리지?’라고 곡해할 수 있다. ‘보고서가 아주 훌륭하다.’라고 칭찬을 보태면 다른 과장으로부터 ‘누구누구에게 뭐 잘 보일 일이라도 있느냐’는 핀잔을 듣는 수가 있다. ‘내 담당 업무가 아니면 침묵이 금이다.’가 불문율인 이유다. 그러므로 용역기관 보고서는 앞으로도 계속 어려운 외국어와 전문용어로 채워지게 될 것이다. #2 이번에는 공무원이 백두군청 노인들에게 새로 도입하는 ‘메타버스 원격의료시스템’을 설명하기 위해 경로당을 방문했다. 그림 2. 원격 진료 중인 의사와 환자 공무원) 어르신들, 앞으로 메타버스 시스템을 이용하면 병원에 가지 않아도 의사가 어르신들 건강 상태를 체크해서 필요한 조치를 해드릴 수 있게 됐습니다. 어르신 1) 저게 뭔 소리여? 어르신 2) 의사들이 자가용 놔두고 맨날 버스타고 와서 건강한지 봐준다는 거여. 공무원) 이제 경로당 출입구도 배리어 프리라 휠체어로도 편히 다닐 수 있게 됐습니다. 어르신 1) 저건 또 뭔 소리여? 어르신 2) 배가 아프면 휠체어 타라는 거여. 자, 이 희극적 상황이 담당 공무원에게 ‘쉬운 우리말을 쓰자’라고만 하면 다 해결될 문제인가? 4차 산업 혁명 회오리에 신기술로 무장한 전문용어들이 하루가 멀게 쏟아지는데, 메타버스를 ‘강화가상현실’이라 한들 소통에 큰 도움이 되겠는가? 대통령이 논하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마저 쉬운 우리말로 대체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므로 공무원들이 어려운 외국어나 전문용어 대신 쉬운 우리말 대체어를 적극적으로 쓰게 하려면 그럴 수 있는 문화가 만들어져야 한다. 예를 들어 매년 쉬운 우리말을 잘 써 주민 소통에 공이 큰 기관과 공무원을 한글문화연대에서 선발하고, 대통령부터 해당 단체장까지의 상을 만들어 시상함으로써 승진에 혜택을 받는 식의 매우 구체적인 동기가 필요하다. 채찍만으로 해결하려 들면 공무원들은 법률과 규정, 조례 뒤로 숨어버린다. 쉬운 우리말 대체어 쓰기는 문화로 풀어야지 공무원 개개인 역량에 호소하거나 법으로 풀려 해선 한계가 있다. (*이 글은 ‘쉬운 우리말 쓰기’를 강조하기 위해 필자가 지어낸 허구이므로 실제 발생한 일이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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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자 : 최보기
- 등록일 : 2021.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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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가 어지럽다 고영회 필자: 고영회 현 성창특허법률사무소 대표변리사 현 서울중앙지방검찰청 형사조정위원 전 대한변리사회 회장 전 대한기술사회 회장 간판은 왜 달까? 비싼 돈을 들여 다는 것인 만큼 다는 효과를 기대할 것이다. 서울 시내 거리에 나가면 수많은 간판이 달려있다. 우리말글 문제를 떠나서 저 간판은 제구실을 하고 있을까? 상표를 다루는 변리사로서 길거리에 있는 간판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길거리에 ‘CHANEL’이라 적힌 간판이 있다. 이걸 어떻게 소리 낼까? 영어로 공부한 사람은 ‘채널’이라 읽을 텐데, 실제는 ‘샤넬’이라 한다. 프랑스 말이기 때문이다. ‘RAISON’이란 이름을 단 담배가 있다. 여러분은 어떻게 읽는지 궁금하다. 내가 담배를 피울 때 ‘레이슨’ 달라고 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레종이라 부른단다. 담뱃갑 어디에도 담배 이름이 그렇다고 표기하지 않아 더더욱 고약하다. 길거리에 나가보면 여기가 한글을 쓰는 대한민국 서울인지 헷갈릴 때가 많다. 길거리 간판에 외국어를 표시한 것이 점차 많아진다. 이게 올바른 현상일까? 길거리 간판에 적힌 글자 성격으로 아래 5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① 우리 글 간판 아직은 이게 가장 많다. 다행이다.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 사람이 주요 손님이니 자기가 하는 사업을 우리글로 잘 알리는 게 지극히 상식이다. 사업을 망하게 하려고 작정하지 않는 이상, 손님이 알아듣지 못하게 적지 않는다. ② 외국에서 들어온 상표(브랜드)로 외국어만 적힌 간판 주로 화장품, 옷, 장신구, 자동차 등 고가 상품이 많다. 어찌 보면 참 오만하다. 자기 나라에서 자기 글자 달고 장사하는 것이야 뭐라 하겠냐만, 한글을 쓰는 우리나라에 와서, 우리나라 사람에게 물건을 팔면서 한글 표시도 없이 자기 글자를 달아놓고 있다. 우리나라 고객의 허영심을 이용한 것일까? 자존심도 버리고 저런 집에 가는 우리가 딱하다. <한글을 쓰는 한국에 걸린 외국어 상표, 자존심도 상하지만 알기도 어렵다> ③ 외국에서 온 상표인데 외국어 원어를 크게 쓰고 한글은 보일 듯 말 듯 작은 간판 이런 종류가 참 많다. 참 이해하기 어려운 간판이다. 베트남 국수, 햄버거, 튀긴 닭, 외식업체 상표에서 많이 본다. 이런 상표를 보면 내가 한국에 있는지, 외국 현지에 있는지 헷갈린다. 우리나라 고객의 생각이나 자세 문제일까? 곤란하다. ④ 외국에서 온 상표지만 한글을 크게 쓰고 외국 원어를 작게 쓴 간판 이게 정상이다. 가장 정상인 모습인데, 이런 간판은 찾아보기 어렵다. 인사동에 있는 스타벅스 커피점은 별스럽게도 한글 이름을 달고 있다. 인사동이라는 장소의 특별함 때문에 그랬다는 풍문이 들린다. 다른 곳에 있는 점포에는 원어를 그대로 달고 있다. <인사동 거리에 있는 외국 상표 커피점> ⑤ 국내 상표지만 아예 영어로 적은 간판 국내에서 창업한 커피점이 많다. 온갖 영어 이름을 달고 있다. 커피는 영어로 이름을 달아야 팔리는 것일까? 요즘에는 튀긴 닭 상표에도 이런 유형이 많이 생기는 것 같다. 10여 년 전에 연변에 갔었다. 연변 간판은 크게 둘로 나누어 한쪽에는 중국 글, 다른 쪽에는 한글로 쓴 것이 눈에 확 들어왔다. 조선족 자치주인 것을 배려한 듯하다. 간판을 보는 시각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자유 경제를 밝히고 있으니 사업자가 좋다고 생각하는 간판을 마음대로 달 수 있어야 하며, 이를 규제하는 것은 기업의 활동을 막는 불필요한 제도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는 한국어를 공용어로 쓰고, 공용어를 적는 글자는 한글이라고 정해 두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쓰는 말은 한글로 적어야 정상이다. 국어기본법 2조에는 “국가와 국민은 국어가 민족 제일의 문화유산이며 문화 창조의 원동력임을 깊이 인식하여 국어 발전에 적극적으로 힘씀으로써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국어를 잘 보전하여 후손에게 계승하여야 한다.”라고 기본 이념을 정하고 있다. 이런 국어기본법의 정신을 생각해서 우리 길거리를 어지럽히는 간판을 정비해야 한다. 옥외광고물법에는 도시지역에 설치하는 광고물은 허가를 받거나 신고해야 한다고 적혀 있다. 이때 신고하는 간판은 ‘한글’을 쓰도록 유도하고, 다른 표시는 필요에 따라 같이 적을 수 있으면 충분하겠다. 국어기본법에는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국어책임관’을 지정하게 돼 있다. 광고물 설치 신고나 설치허락서가 접수될 때 책임관이 검토하여 신고를 수리하거나 허락해 주면 해결될 것이다. 길거리 간판을 보면 우리가 영어권 지배를 받는 나라인가 싶은 느낌이 온다. 우리글 한글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만든 이가 밝혀진 글자이고, 세계 언어학자가 우수한 글자라고 평가한다. 실제 배우고 익혀 쓰는 데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는다. 이렇게 우수하고 자랑할 만한 한글을 우리가 푸대접해야 하겠는가. 제도로 하나하나 이렇게 정비해 나가면 어지러운 길거리가 곧 깔끔해질 것 같다. 이런 것까지 간섭하냐고? 우리말과 우리 글자를 공용어로 하는 나라에서 당연한 일이다. 그래야 우리나라를 찾는 외국인도 글자를 보고서 한국에 왔구나 하고 느끼지 않겠는가! 무엇보다 당신의 사업을 잘 알리는 데 우리글이 가장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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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자 : 고영회
- 등록일 : 2021.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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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빙과 힐링을 빼니 치유가 보인다 성제훈(농촌진흥청 대변인) 성제훈 공학박사, 농촌진흥청 연구원 현) 농촌진흥청 대변인 저서) 성제훈의 우리말 편지 I, 성제훈의 우리말 편지 II 우리말도 그렇지만, 영어의 말뿌리(어원)를 알면 그 낱말의 뜻을 좀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다. 영어 ‘culture’를 받아들이면서 한자권에서는 ‘문화(文化)’라고 번역했다.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 일정한 목적을 실현하고자 사회 구성원들이 함께하는 행동 양식 등을 문화라고 쓴 것이다. ‘농업’이라고 번역하는 ‘agriculture’의 말뿌리는 땅에서(agri) 사회 구성원들이 함께하는 일(culture)에서 왔다. 예전에는 모여 사는 집단 사이에 교류가 없었기 때문에, 이 동네에서 농사짓는 방식과 저 동네에서 농사짓는 방식이 서로 달랐다. 그렇게 서로 다른 농사짓는 방식이 바로 영어로 ‘agriculture’이다. ‘culture’를 받아들이면서 ‘문화’라는 멋없는 낱말 말고 ‘삶의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agriculture’는 ‘농업(農業)’이 아니라 ‘먹거리 만들기’로 받아들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때늦은 아쉬움이 든다. 그러나 역사에 가정은 없다. 이미 늦었다. 굳을 대로 굳어버린 이 말을 바꿀 수는 없다. 쓰임새가 굳어버리기 전에 고민했어야 했다. 그런 노력을 농업 분야의 용어를 정하는 데에 쏟은 예를 소개하련다. 그림 1. 자연과 인간 우리나라에는 5,000개가 넘는 법이 있다. 대부분 법은 국가가 사람들의 자유와 권리를 일정 부분 제한하는 기준이다. 그래서 법은, 무엇보다, 권리를 제한받는 국민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국민들이 쉽게 받아들여야 법을 만든 취지가 퇴색되지 않을 것이고, 국민들의 수용성도 높아진다. 2021년 3월 25일에 ‘치유농업법’이 시행되었다. 이 법은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는 법이 아니라, 자유와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해주는 법이다. 그 법을 만들고 시행하는 과정에서 우리말과 외국어/외래어 문제를 고민해볼 시간이 있었다. 그림 2. 숲에 누워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 (출처: 서울특별시 소방본부) 웰빙(well-being)이라는 영어 낱말이 있다. 우리가 누리는 산업 고도화는 인간에게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준 반면, 정신적 여유와 안정을 앗아간 면도 적지 않다. 현대사회는 구조적으로 사람들에게 물질적 부를 강요하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를 축적하는 데 시간을 소비한다. 따라서 물질적 부에 견줘 정신 건강은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산업사회의 병폐를 인식하고, 육체적·정신적 건강의 조화를 통해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추구하는 삶을 영위하려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2000년대 초반부터 나타난 새로운 삶의 문화 또는 그런 양식이 웰빙이다. 힐링(healing)이라는 영어 낱말도 있다. 치유하다, 낫다는 뜻을 지닌 ‘힐(heal)’의 명사형으로 10년쯤 전에 언론에 소개되었다. 그전에는 뜻을 모르는 사람도 많았지만, 각종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유행처럼 번진 2010년대부터 흔하게 쓰고 있다. 힐링이 막 퍼지기 시작할 무렵, 비판도 같이 나왔다. 힐링이 여러 문제에 직면한 사람의 기분을 풀어주고 정신적 안정을 되찾게 함으로써 다시 생활을 지속하는 데 도움을 줄 수는 있을지언정, 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현실에서 당면한 여러 물질적 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한다는 점이 비판의 핵심이었다. 즉 희망 고문만 한다는 거다. 또, 많은 자기 계발서에서 힐링이라는 단어는 현실 도피로 바꿔도 전혀 내용상 모순점이 없을 정도로 잘못 쓰고 있기도 했다. 이 때문에, 힐링 열풍은 고통받고 있는 청년들의 아픔을 듣기 좋은 말로 슬쩍 덮어버린다는 비판도 받았던 게 사실이다. 그림 3. 농촌 체험학습에 참가한 어린이들 이 무렵,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농촌진흥청에서 농촌에 널려 있는 자원이나 이와 관련된 활동을 이용하여 국민의 신체, 정서, 심리, 인지 등의 건강을 챙길 수 있는 산업을 찾아 나섰다. 농업을 응용하고 농촌에서 웰빙과 힐링을 함께할 방안을 찾는 법률을 만들고자 했는데, 웰빙과 힐링을 아우를 수 있는 낱말을 찾는 데서 막혔다. 물질적 풍요가 필요한 웰빙과 정신적 스트레스를 줄여주는 힐링을 합친 낱말이 필요했다. 웰빙이나 힐링이라는 외국에서 온 말을 우리나라 법률 이름에 쓰는 것도 어색하고, 그렇다고 새로운 낱말을 만드는 것도 쉽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현실적인 문제도 감안하여 대안으로 찾은 것이 ‘치유’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치유농업법에서 ‘치유농업’을 “국민의 건강 회복 및 유지·증진을 도모하기 위하여 이용되는 다양한 농업·농촌자원의 활용과 이와 관련한 활동을 통해 사회적 또는 경제적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산업”으로 정의했다. 아쉽지만, 현실적으로, 국민이 자유와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쉽게 안내해주는 법 명칭이다. 치유농업과 일반 농사와의 가장 큰 차이점은 치유농업은 농사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건강의 회복을 위한 수단’으로 농업을 활용한다는 것이다. 경쟁에 지친 도시민들이 농업·농촌에서 치유하는 도움을 얻으려는 수요가 증가하는 추세에서 공익적인 치유 농원이나 원예치료 등의 효과성을 검증하고 치유 산업과 관련된 더욱 깊이 있는 정책적 지원 또한 필요한 상황이다. 사회가 고도화되고 외국과의 교류가 늘면서, 외국어가 우리 문화에 들어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럴 때, 외국어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우리 문화에 맞게 바꿔서 받아들이면 그 말을 쓰는 국민의 이해도가 높아진다. 우리말에 비행접시가 있다. ‘Unidentified Flying Object’의 약자인 ‘UFO’를 이르는 우리말이다. 유에프오를 ‘정체불명의 비행체’로 받아들이지 않고, 넓적한 접시처럼 보이는 게 날아다닌다고 해서 ‘비행접시’로 ‘번역’하여 받아들였다. 이처럼, 우리네 삶과 이어진 새로운 낱말을 만들어서 받아들이면 가장 좋다. 새로운 낱말을 만들 시간적 여유가 없거나 사회적 공감대 형성이 어려우면, 외국어 단어가 아닌 우리말을 쓰면 된다. 웰빙이나 힐링을 대체할 낱말로 ‘치유’를 쓰는 게 그런 보기이다. 요즘 4차 산업 혁명 이야기를 하면서 에이아이(AI)나 빅데이터 따위 낱말을 많이 쓴다. 최근 들어서는 메타버스 이야기도 자주 한다. 이런 낱말이 우리네 삶에 똬리를 틀기 전에 우리 삶과 버무린 멋진 낱말로 하루빨리 바꿔야 한다. 그게 바로 기성세대가 후세에게 해 줄 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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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자 : 성제훈
- 등록일 : 2021.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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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과 AI 이동현 / 전산학 박사 이동현 (주)테크베이스 이사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전산학 박사 인공지능 기술이 급격히 발전하면서 ‘에이아이(AI)’가 기술적, 상업적 유행어로 떠올라 널리 쓰인다. 온갖 광고에 에이아이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에이아이(AI)는 Artificial Intelligence의 약자인데, 이게 '인공지능'이라는 말보다 있어 보이나 보다. 최근 들어 기술적인 각광을 받아서 그렇지 사실 인공지능의 역사는 짧지 않다. 컴퓨터의 역사가 곧 인공지능의 역사이다. 컴퓨터 자체가 생각하는(좁은 의미로 ‘계산하는’) 기계를 만들려는 목표 아래 발전했다. 수많은 공학자, 기술자들이 컴퓨터를 발명하고도 ‘스스로 생각하는’ 기계를 만들기 위하여 큰 노력을 쏟아부었다. 컴퓨터가 훌륭한 발명품이긴 하지만 고급 계산기에 불과하므로 ‘생각한다’는 개념의 수준에 어울릴 만큼 매력적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초기에 프로그래밍 언어도 인공지능을 만들기 위하여 개발되었다. ‘언어’야말로 사람처럼 생각할 수 있는 지적 생명체가 수행하는 활동이라고 보았으므로, 그런 인공 언어를 만드는 것이 인공지능 개발의 일환이기도 했다. 국내에서도 이미 1980년대부터 인공지능 연구가 시작되었으니 역사가 짧지는 않다. 하지만 초창기에는 컴퓨터의 속도가 충분하지 못해서 실용적인 결과를 얻기 어려웠다. 1980년대 말, 인공지능을 공부할 때는 이 지능이 동작하는 게 너무 느려서 연구자끼리 농담으로 ‘인공저능’이라는 말을 쓰곤 했다. 영어로도 머리글자가 같게 ‘Artificial Ignorance’라고 불렀다. 그 뒤로 하드웨어 성능이 기하급수적으로 좋아져 현실적인 활용이 가능한 인공지능 기술의 결과가 나오고 이제 곧 모든 일을 인공지능에 맡길 것 같은 분위기가 되었다. 그동안 ‘생각하는 기계’로서 인공지능을 만들려는 노력은 크게 두 갈래로 뻗어왔다. 하나는 우리가 아는 논리적 지식을 체계적으로 입력하고 이를 논리적으로 처리하는 ‘기발한’ 방법을 고안하는 것이다. 독일의 수학자 힐베르트의 꿈처럼 엄격한 논리체계 위에서 논리적 창의가 발전하는 기계를 만들고자 하는 길이었다. 이 방법은 방대한 지식을 논리적으로 가공하는 데 매우 큰 노력이 들고 우리가 아는 지식이 논리적으로 완벽하게 가공되지 않는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다른 방법은 뇌가 생각하는 방식을 흉내 내는 것이다. 인공신경망(Artificial Neural network)이라고도 하는데, 뇌의 기제를 소프트웨어로 흉내 내는 방법이다. 뇌신경망은 각 신경세포가 자신이 받은 자극을 간단한 연산에 해당하는 처리를 한 후 다른 신경세포에 전달하고, 전체 신경망에서 발생하는 이런 과정의 총합이 ‘생각’을 만든다. 이 방법의 장점은 인공신경망이 스스로 배울 수 있다는 점이다. 예만 보여주면 그 예들을 통하여 인공신경망이 배우는 것이다. 이 방법은 논리적 체계를 엄밀히 가공할 필요는 없지만 굉장히 많은 계산을 하여야 한다. 즉, 컴퓨터의 성능이 매우 좋아야 한다. 최근에 각광받는 인공지능은 주로 이 인공신경망 기술을 말한다. 바둑에서 사람을 이긴 알파고도 이 인공신경망이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인공지능의 발전이 해당 분야의 기술 발전도 있겠지만 크게는 컴퓨터 하드웨어 발전의 결과라는 것이다. 빠른 속도로 처리할 수 있는 엄청난 컴퓨터 자원을 동원하여 인공신경망이 실용적인 수준의 결과를 만들어 내면서 인공지능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대중 곁으로 바싹 다가온 인공지능과 함께 전문가들의 용어인 에이아이도 대중의 언어 세계에서 자리를 잡아간다. 현대 기술이 외국에서 발전하여 들어온 경우가 많으므로 영어로 된 기술 용어를 쓰는 일이 자연스럽게 벌어진다. 하지만 기술이 보편화되고 일상으로 들어오면서 외국어 용어가 따라 들어오면 그 분야의 사람이 아닌 경우에는 상당히 생소하여 뜻을 즉시 알 수 없는 용어가 된다. 일상적으로 쓰는 말이라면 들어서 즉시 알 수 있는 수준의 말이 되어야 한다. 물론 ‘즉시’의 범위가 모호하거나 넓을 수는 있지만, 적어도 그런 것이 목표나 방향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서로 쉽고 분명하게 의사를 전달할 수가 있다. 물론 광고처럼 어떤 것을 새롭게, 특이하게 보이도록 하여 사람의 주목을 받고 싶은 경우는 일부러 뜻을 알기 어려운 용어를 쓰기도 한다. 하지만 일상적으로 사용할 수준의 용어라면 이해하기 쉬운 정도를 고려해야 한다. 과학과 기술을 다루는 영역에서도 종종 이 용어 문제로 고민하고 의견 대립을 일으키기도 한다. 특히, 이렇게 일상으로 들어오는 기술 용어를 이해하기 쉬운 우리말로 바꾸자고 하면 이미 그 분야에서 그런 외국어 기술 용어에 익숙한 사람들이 반발하는 경우가 있다. 반발의 요지는 대개, 그 말이 전문 분야에서 이미 오래 사용되었고 그 개념 자체가 외국에서 만들어진 것이라 번역하고자 하여도 우리말에 꼭 같은 혹은 대용할만한 개념이 존재하지 않아서, 새삼스럽게 바꿔 혼동을 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 개념을 명확히 아는 전문가들은 자기에게는 ‘어설픈’ 번역 용어가 마땅치 않을 수 있다. 의미를 잘못 전달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커지는 것이다. 이런 걱정이 때로는 실제적일 수도 있고, 때로는 지나친 기우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백업(backup)이라는 말은 이제는 많은 직장인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잘 이해하고 있으리라. <표준국어대사전>에도 올라와 있다. 의미는, 혹시 발생할 수 있는 원치 않는 일에 대비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그냥 ‘대비하다’ 정도로 대신 사용한다면 나타내려는 뜻과 느낌에서 차이가 생긴다. 예를 들어 “그 파일 잘 백업 해둬.”라고 할 말을 “그 파일 잘 대비해둬.”라고 하면 좀 애매하다. 앞의 말을 듣고는 아마 그 파일을 안전한 다른 곳에 복사해 두겠지만 뒤의 말은 언제 사용될지 모르니 잘 준비해 두라는 것인지 어쩌라는 것인지 분명치 않다. 그러니 적당하게 대신 쓸 말이 없어서 대부분 백업이라고 쓴다. 다른 예로, 디폴트(default)라는 말은 경제 용어로는 채무불이행이라는 뜻인데 컴퓨터 용어로는 기본값이라는 뜻이다. 컴퓨터 관련 용어로서 디폴트는 대부분 기본값이라는 말로 바꿔 쓸 수 있다. 그러나 습관 때문인지 혹은 뭔가 전문가다운 느낌 같은 것 때문인지 디폴트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그래서 처음 이 말을 접하는 사람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과학이나 기술의 영역에서 우리나라, 혹은 우리말을 쓰는 지역이 원천 기술의 발생지가 아닌 경우가 많아서 외국어로 수많은 개념을 배운다. 그러다 보니 전문 영역에서 그런 말을 그대로 쓰는 것이 편하기도 하고, 계속되는 국제적 기술 교류에도 유리하다. 우리가 고유의 기술이나 개념들을 발견, 창안한다면 우리말로 된 용어들을 만들고 사용하게 되었을 것이다. 아쉬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말로 용어를 고치는 일도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새로 배우는 사람들이 우리말 용어를 접하면 이해가 빠르고 쉬울 수 있기 때문이다. 정확한 대응 말이 없어서 개념을 혼동하게 할 위험도 있지만, 용어를 듣고 바로 개념까지 이해된다면 배우기가 쉽고 그 결과 해당 분야의 발전도 빠를 수 있다. 알려진 것처럼 북한은 용어를 우리말로 바꾸는 노력을 많이 한다. 모든 걸 다 우리말로 바꾼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던데 북한 역시 첨단 과학과 기술 분야에선 외국어를 그냥 사용하는 일도 많다. 개인적으로 참 잘 바꾼 것 같은 컴퓨터 관련 용어는 ‘봉사기’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컴퓨터 서버(server)를 북한에서는 ‘봉사기’라고 한다. 영어를 그대로 직역한 느낌도 나지만 꽤 괜찮은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컴퓨터 분야에서는 클라이언트-서버(client-server)라는 두 개의 대응되는 단어를 시스템 간의 관계에 사용하는데 이를 북한에서는 의뢰기-봉사기라고 한다. 의뢰기는 좀 더 낯설기는 하지만 읽고 바로 두 시스템이 무슨 관계인지 알 수 있다. 근본적으로 우리가 만든 기술이 아니라서 생기는 과학 기술 용어 문제에는 첨단 기술의 발전을 고려한 시각으로 봐도 빨리 배울 수 있게 할 것인가, 아니면 계속 기술 추적이 쉽게 할 것인가 고민이 생긴다. 두 마리 토끼는 잡기 어렵지만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아야 하는 문제는 많다. 그렇게 쉬웠으면 애당초 문제가 아니었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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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자 : 이동현
- 등록일 : 2021.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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