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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나 쓰고 아무도 모르는 거버넌스, 너 뭐니? 최보기 / 관악구청 청년정책과 구로구청 구정연구관 최보기. 관악구청 청년정책과 구로구청 구정연구관, ‘최보기의 책보기’ 연재 서평가, 저서 『거금도 연가』 『놓치기 아까운 젊은 날의 책들』 『박사성이 죽었다』 『독한시간』 어쩌다 지방자치단체 ‘어공’(어쩌다 공무원)이 돼 ‘늘공’(늘 공무원)들과 일한 지 몇 년째다. 그사이 확실히 알게 된 하나가 ‘공무원은 문서로 일한다.’는 사실이다. 모든 과업은 문서와 증빙으로 시작해 문서와 증빙으로 끝나는데, 첫 문서와 마지막 문서 사이에 ‘문제 될 것’만 없으면 과업은 성공으로 종결된다. 공무원들이 작성한 보고서, 방침서, 계획서 등 각종 문서를 읽다 보면 ‘다양한, 시너지, 효율화, 극대화, 제고, 향상, 체계적’이 없다면 이들은 어떻게 일을 할 수 있을까 싶게 저 단어들을 애용한다. 주로 주민에게 행정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무를 하다 보니 저 단어들이 문장 안에서 ‘다양한 시너지를 발휘해 문장의 효율을 극대화’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단어뿐만이 아니다. 문서 틀도 대부분 같고, 문장들 역시 과업에 따른 주어, 목적어 등 핵심 단어만 다를 뿐 비슷하다. 그럼에도 문장때문에 생기는 문제는 전혀 없다. 지난 수십 년간 국장도 팀장도 주무관도 그렇게 써왔지만 아무 문제가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외국어 사용도 마찬가지다. 그 뜻이 애매하거나 매우 어렵더라도 다른 공무원들이 다 쓰는 상황이면 굳이 쉬운 우리말로 풀어쓰는 것이 오히려 위험하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것으로 누가 시비를 걸면 ‘다른 공무원들도 다 그렇게 씀’을 증빙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퍼실리테이터, 아트테리어, 크리에이터, 벤처인큐베이터, 큐레이션, 젠트리피케이션, 버스킹, 잡코칭, 메이커스페이스, 디지털 인플루언서, 엑셀러레이터’ 같은 외국어가 공문서에 자주 쓰이고 ‘메타버스, 콜드체인, 부스터샷’ 등이 새로 등장했다. 이들에 비하면 ‘리모델링, 마스터플랜, 페스티벌, SNS, MOU, 네트워크, 컨설팅, 스타트업, 거버넌스’ 등은 쉬운 축에 들어간다. 그림 1. 공무원은 언제나 문서로 일한다. 거버넌스! 자치단체장 선출 시대라 그런지 공문서에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외국어 중 하나다. ‘민·관·학 거버넌스의 효율적 구축과 다양한 운영으로 시너지 극대화를 추진하고자 함’에 쓰인다. 행정학을 전공했지만 이쪽 업계에 처음 왔을 때 자주 접하는 거버넌스(Governance)의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어 ‘검색’으로 공부했다. 아직 학문적으로 개념이 정립되지 않았다는 거버넌스를 자습으로 이해한 바는 이렇다. 국가를 운영하는 기구인 정부(Goverment)는 주로 공무원들로 구성된다. 공무원들이 주어진 권한과 책임으로 법규, 제도, 정책을 만들고, 집행하면서 나라가 굴러간다. 이를 통치(統治)라 한다. 왕정이나 전체주의 국가와 달리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민주주의 국가라면 ‘다스릴 치(治), 두루 다스린다’는 통치도 딱히 마땅한 단어는 아니나 달리 대체어가 없다. 거버넌스는 정부의 통치, 즉 정책 수립과 예산편성, 집행까지 의사결정 과정에 민간인(단체)이 함께 참여하는 행위 또는 기구(조직)를 말한다. 쉽게 말해 민간인 활동가, 전문가와 공무원이 함께 ‘00정책위원회’를 조직해 정부가 하는 일(행정)을 같이하는 것이다. 거버넌스를 통치와 대립하는 ‘협치, 민관 협치(協治), 협치 행정’ 등 우리말로 대체하는 연유다. 당연하나 ‘민관 협치’는 누구든 대충이라도 그 개념을 짐작하는 반면 거버넌스에 대한 정확한 이해도는 낮고, ‘동네 주민’은 100% 모른다. 그림 2. 민·관·학 거버넌스를 표현한 사진 그럼에도 공무원들은 왜 협치를 비롯해 쉬운 ‘예술 장식가’ 대신 ‘아트테리어’를, ‘회의 도우미’ 대신 ‘퍼실리테이터’를 쓰게 될까? 필자 나름대로 연구가 아닌, 추정하는 이유는 대략 이러하다. 첫째, 외국어는 왠지 섹시하고, 뭔가 모르게 있어 보인다. 과업 완수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공부한 흔적도 보인다. 행여 상관이나 결재권자가 ‘아트테리어가 뭐냐’ 물으면 외웠거나 메모해둔 대로 ‘뉴 트렌드’를 설명하는 보람이 있다. 둘째, 지금껏 써왔기에 익숙하다. 우리말 대체어는 쉽기는 하나 낯설고 어색하다. 왠지 프로페셔널하지 않고 촌스럽다. 셋째, 딱히 알고 있는 우리말 대체어가 없기도 하나 혹시 그런 게 있는지 알아보는 것도 귀찮다. 사업 계획서에 예술 장식가를 아트테리어로 썼다고 문책당한 공무원도 없다. 넷째, 어려워야 질문이 없다. 우리말로 쉽게 쓰면 상관이나 의회 의원들의 질문과 따짐, 추궁이 많아진다. ‘어려운 외국어 이름을 단 아파트에 살면 시골 시부모 방문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엉터리 연구 결과’와 비슷한 이치다. 공무원들이 의회에 보내는 추가경정예산 사업 계획서 산정 예산을 ‘3,209백만 원’ 대신 ‘32억 9백만 원’이라 써놓으면 당장 ‘무슨 돈을 이렇게 많이 쓰냐’는 ‘겐세이’가 들어올 확률이 높아진다. 다섯째, 서비스 수혜 주민이 싫어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전통시장 노후 간판 교체 지원 사업만 하더라도 ‘예술 장식가가 제작한 간판으로 교체’보다 ‘아트테리어가 디자인한 간판으로 리모델링’에 상인들의 반응이 훨씬 호의적이다. 참여하는 전문가도 예술 장식가보다 아트테리어로 불리길 원한다. 공무원은 주민이 좋아하는 일을 더 좋아한다. 여섯째, 앞에서도 밝혔지만 다른 공무원들도 다 아트테리어라고 쓰는데 나 혼자 튈 이유가 없다. 용감하게 우리말 대체어를 썼다가 행여 그 단어 때문에 문제가 생기면 ‘면피’할 구실이 없다. 이 다섯째, 여섯째가 코아 컴피턴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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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드 코로나’, 함께 갈 수 없는 말 이건범 / 한글문화연대 대표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 작가, 서울시와 경기도 국어바르게쓰기위원, 국토교통부 철도역명심의위원 역임 저서에 <언어는 인권이다>, <한자 신기루> 등 정부와 언론 등 여기저기서 ‘위드 코로나’라는 말을 사용하니 혹시라도 방역에 문제를 일으킬까 하여 방역 당국에서 이 말 사용을 피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공공언어에서 외국어나 모호한 용어를 사용할 때 일어날 수 있는 혼란을 잘 보여준 사건이다. 중앙사고수습본부 관계자는 “이 용어 자체가 정확한 정의가 없는데 너무 포괄적이고 다양한 의미로 활용된다”라며 “확진자 발생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없앤다는 의미로도 표현이 되고 있어 방역적 긴장감이 낮아지는 문제점이 있다”라고 말했다. 정부 차원에서는 ‘단계적 일상 회복 방안’이라는 말을 검토 중이란다. 찬성이다. 그런데 질병관리청 정은경 청장도 이미 몇 차례 이 말을 사용했었다. 8월 23일에 정 청장은 “9월 말이나 10월 초부터는 위드 코로나 준비 작업, 검토 작업을 공개적으로 진행할 수 있다”(경향신문)고 말했고, “위드 코로나로 방역전략의 전환을 하려면”(머니투데이 8월 26일), “준비 작업을 지금부터 진행해야 위드 코로나로의 전환이”(문화방송 뉴스투데이 8월 27일) 등 서너 차례 ‘위드 코로나’라는 말을 사용했다. 당시엔 이런 위험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북유럽 어느 나라에서 처음 이 말을 썼다고는 하지만, ‘위드’라는 단어가 가진 모호함을 무시하고 그 말을 따라 하기 시작한 건 ‘포스트 코로나’를 사용했던 전력 때문이리라. 대통령을 비롯하여 무수한 정부 관계자와 언론인, 유력인사들이 ‘포스트 코로나’를 수없이 입에 올렸으니 비슷한 꼴의 영어로 된 ‘위드 코로나’는 포스트 코로나의 정당한 계승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위드 코로나. 멋있게 들리기는 하는데 뜻은 모호하다. 흔히 암과 같은 중병에 걸렸을 때 그 병을 완치하기 어렵다면 생각을 바꾸어 그 병과 함께 살아간다고 말하면서 삶의 건강성을 지키려 한다. 그것은 가까이 다가온 죽음을 마음 비우고 받아들인다는 초연함과 더불어 투병 이전과는 다른 삶의 태도로 선택하고 지킨다는 뜻을 가진다. 하지만 한 개인의 병이 아니라 무서운 속도로 사회 전체를 감염시키는 바이러스와 함께 산다는 위드 코로나의 의미가 일반 국민들에게는 어떻게 다가갈까? 지금처럼 마스크가 몸의 한 기관이 되어버린 상황은 물론이고 거리두기 4단계가 우리의 일상이 된다는 뜻인가, 코로나를 옆에 끼고 살아도 될 정도로 결정적 위험은 없다는 뜻인가? 확실히 ‘위드 코로나’는 어떤 사람에게는 억측을 부르고 어떤 사람에게는 막막한 불안감을 줄 수 있는 말이다. 사실 ‘포스트 코로나’도 그랬다. 포스트가 ‘이후’라는 뜻이지만, 포스트 코로나가 ‘코로나 유행 이후’인지, ‘코로나 종식 이후’인지 모호했고, 실제로 두 가지 의미로 혼란스럽게 쓰였다. ‘위드 코로나’는 ‘포스트 코로나’의 이런 모호함마저 이어받았다. 말 한마디에도 늘 신중한 질병관리청조차 이런 함정에 빠진 것은 정부 당국자들과 관공서에서 여전히 사그라지지 않는 영어 남용 분위기 탓이리라. 나라 경제를 끌어올린다는 한국판 뉴딜 정책의 주요 사업명은 거의 모두 영어 단어로 되어 있고, 그 용어들이 우리 주변에서 다양한 생활 정책의 이름으로 확대 재생산된다. 이런 분위기에서 위드 코로나 같은 말을 사용하는 일이 무슨 위험이나 문제를 부르리라 생각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이번 위드 코로나 사태에서 보았듯이 국민의 안전을 다루는 말, 재산과 복지와 온갖 권리와 의무를 다루는 공공언어가 우리나라 공식어인 한국어가 아닌 외국말로 표현될 때는 정책의 효율이 떨어지거나 혼선을 일으키기 쉽다. 더구나 외국어 약자인 어떤 국민들의 알 권리를 위협하기도 한다. 모든 국민에게 고루 방역의 손길을 건네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코로나 방역 당국에 늘 고마움을 느끼고, 이분들이 처음엔 무심코 썼다가도 곧 국민이 알아듣기 쉬운 말로 바꾸어 쓰려 애썼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다만, 앞으로도 국민들이 뜻을 바로 알아채기 어려운 전문용어나 외국어 신조어를 무심결에 입에 담는 일은 삼가길 부탁한다. 코호트 격리, 팬데믹, 트윈데믹, 포스트 코로나, 위드 코로나 등 그런 말들은 국민에게 정확한 정보를 전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고, 그 결과로 원활한 방역에도 장벽이 되기 때문이다. 이 글은 이데일리에 기고문으로 실렸음을 밝힙니다. (2021년 9월 9일) https://www.edaily.co.kr/news/read?newsId=01164406629178480&mediaCodeNo=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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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자 : 이건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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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코로나의 시대는 언제인가? 조형근 / 사회학자 조형근 사회학자. 소셜랩 접경지대 소장 <사회를 구하는 경제학>, <섬을 탈출하는 방법> 등의 저서와 <사회적 가치와 사회혁신>, <좌우파사전: 대한민국을 이해하는 두 개의 시선> 등의 공저가 있다. 코로나19가 유행한 지 벌써 1년 반이 넘었다. 처음에는 한두 달 이러다 말겠지 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감염병의 고통은 역사책이나 다큐멘터리에서나 접하는 이야기였는데, 어느덧 벗어날 수 없는 일상이 됐다. 백신이 나왔다지만 아직 접종률도 충분하지 않고, 변이에 대한 효과도 미심쩍다. 어서 코로나19가 없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데 바람만큼 쉽지 않을 것 같아 울적해지기도 한다. 코로나19(이후 코로나로 줄임) 유행이 길어지면서 ‘포스트 코로나’라는 신조어도 유행하고 있다. 라틴어에서 유래한 접두사 ‘포스트(post)’는 무엇인가의 ‘후에’, ‘뒤에’라는 뜻을 담고 있다. 애프터(after)와 뜻이 같다. 그러니까 포스트 코로나는 ‘코로나 이후’라는 뜻이다. 인터넷 포털 다음백과는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사태 이후의 세계. 팬데믹 현상과 함께 전 세계를 감염병 공황 상태와 함께 방역을 위한 자가격리, 사회적 거리두기, 재택근무 등의 새로운 사회문화적 현상을 초래했던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가 가져올 사회적 변화 양상과 추이를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2020년 3월 <월스트리트저널>과 세계경제포럼 등의 칼럼에서 사용되면서 널리 인용되기 시작했다. 코로나라는 전염병이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난 이후의 특징적인 상황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것이다. 그림 1. 교육방송(EBS) 다큐프로그램(포스트 코로나) 예고 화면 이 말이 얼마나 많이 사용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한국언론재단에서 운영하는 언론기사 검색사이트 빅카인즈에서 검색해봤다. 2020년 1월 1일부터 2021년 7월 30일까지 54개 신문과 방송사의 기사를 검색해 보니 8,399건의 뉴스, 10,819건의 인용문이 검색됐다. 엄청난 양이다. 포스트 코로나는 이미 친숙한 단어가 됐다. 정부와 언론, 기업, 시민사회를 가리지 않고 이 신조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널리 쓰이는 만큼 이 말의 의미도 분명할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실제 용례를 살펴보자. 지난 7월 26일 자의 어느 보도 내용이다. 정부는 당일 열린 세제발전심의위원회에서 막대한 세수 감면 효과가 기대된다는 ‘2021년 세법개정안’을 확정해 발표했다. 이 세법개정안에 대해, “정부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 새로운 성장 동력을 확보하고, 심화된 우리 사회 양극화를 해소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고 설명했다”(「코로나 추경 116조 쏟고도 세금 깎아주나…1.5조 중 0.9조 ‘재벌 감세’」. 뉴시스 2021.07.27.) 여기서 포스트 코로나 시대라는 말은 코로나가 창궐하고 있는 요즘을 가리키고 있다. 앞서 본 백과사전의 정의와 같다. 하지만 다른 뜻으로 쓰기도 한다. 아래 보도를 보자. 2분기까지만 보면 좋았습니다. 그런데 3분기는 지금 사회적 거리두기가 있어서 안 좋았을 것 같은데요. 2분기까지 나온 통계를 보면 완연하게 포스트코로나로 넘어가려는 그런 국면들이 보이고 있고요. 지금 카드 승인 액수들이 나오고 있고 건수도 나오고 있는데. 아마도 보복 소비 스타일, 아직까지 나온 건 아닙니다, 저 정도로는. 그게 원래대로 했었으면 7월, 8월 휴가철에 나왔어야 됐는데. 일단은 사회적 거리두기 4단계 또 델타 변이 때문에 멈춰 있는데요(「라면값도 달걀값도 줄줄이 올라...밥상 물가 인상 현실화」, YTN 2021.07.30.). 여기서 “완연하게 포스트코로나로 넘어가려는 그런 국면”이란 말은 맥락상 코로나가 종식되고 소비가 완연하게 회복되는 상황을 가리킨다. 2분기까지는 소비가 늘어나면서 소비 측면에서 보면 코로나가 끝나가는 것처럼 보였다는 말이다. 이처럼 포스트 코로나를 코로나 종식 이후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용례도 적지 않다. 코로나 이후 재택근무자가 50만 명을 돌파했다는 최근의 보도를 보자. “일할 때 일하되 무리하게 관계를 맺기 싫어하는 MZ세대(1980~2000년대 초 출생자) 등장에 일과 가정 양립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화 등이 강해지며 포스트코로나 시대에도 재택근무가 점차 확산될 것”이라는 내용이다(「아직도 회사 출근하니?…재택근무 50만 명 넘었다」, 『매일경제』 2021.07.26.). 이때의 포스트 코로나는 맥락상 코로나가 종식된 이후를 가리킨다. 종식 후에도 재택근무가 확산되리라는 예상을 담았다. 그림 2. ‘포스트 코로나’, 코로나 유행 이후인가? 코로나 종식 이후인가? 어느 쪽이 맞고 어느 쪽이 틀린 것일까? 사실은 모두 맞다. 따지고 보면 코로나 이후라는 시기 안에는 두 가지 종류의 질적으로 다른 시기가 있다. 하나는 코로나 유행이 계속되는 시기, 또 하나는 유행이 끝난 후의 시기다. 두 시기 모두 ‘포스트 코로나’지만 상황은 완전히 다르다. 그래서 혼란스럽고, 그래서 문제다. 코로나 유행기와 종식 이후의 시기에 정부의 정책과 시민의 태도는 매우 다를 수밖에 없다. 코로나와 같은 위중한 감염병을 다루면서 정부와 언론이 이렇게 모호한 표현을 남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런 혼란은 포스트라는 단어 자체가 중의적인 탓도 있다. 1880년대 후반에 형성된 미술 사조 포스트 임프레셔니즘(Post-Impressionism)은 후기인상파로도, 탈인상파로도 번역된다. 이 사조로 분류되는 폴 세잔, 폴 고갱, 빈센트 반 고흐 같은 화가들이 한편 인상파의 특징을 계승하면서도, 다른 한편 거기서 벗어나는 혁신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문예 사조이자 인문학 방법론인 포스트 콜로니얼리즘(Post-colonialism)은 후기식민주의로도, 탈식민주의로도 옮길 수 있다. 식민주의와의 연속적 측면을 강조할 것인가, 단절적 측면을 강조할 것인가에 따라서 어느 쪽으로도 옮길 수 있다. 실제의 현실은 연속과 단절의 복합체이겠지만, 번역어의 선택은 어떤 측면에 더 주목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때로 이런 중의성을 그대로 살리고 싶은 이들은 포스트라는 단어를 그대로 사용하기도 한다. 모두 학문적 논쟁의 영역이다. 학문이나 예술 분야에서 포스트라는 단어의 중의성은 혼란을 일으키는 만큼이나 생산적 논쟁이나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후일에 오늘날을 회고하면서 ‘코로나19 종식 이후가 진정 종식이었을까?’ 같은 논쟁의 맥락에서 포스트 코로나라는 표현을 중의적으로 쓸 수는 있을 것 같다. 지금 정부와 언론이 포스트 코로나를 이런 학술적 맥락에서 일부러 중의적으로 사용하고 있을 리는 없다. 그래서도 안 된다. 그저 서구에서 사용하니 멋있어 보여서 유행에 편승하고 있을 뿐이라는 데 한 표 던진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부의 발언에 해석본이 필요해서는 안 된다. 언론도 마찬가지다. 코로나19 유행 이후, 코로나19 종식 이후 정도로 구별해서 표현하면 아무 혼란도 없을 일이다. 서구 유래의 단어 사용에 무조건 반대할 필요는 없다. 때로 외국어는 우리말과 사유를 풍요롭게 자극하고, 이윽고 우리말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 이 경우의 포스트는 그렇지 않다. 태어난 곳으로 돌려보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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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자 : 조형근
- 등록일 : 2021.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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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차감염, 이대로 둘 것인가? 은희철 /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명예교수 은희철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명예교수 대한민국 의학한림원 의학용어 개발 및 표준화위원회 위원 용어관련 저서: 아름다운 우리말 의학전문용어 만들기 어근을 통한 의학용어 길잡이 우리말 의학사전(번역서) 지난해부터 코로나바이러스가 만연하여 일반인들도 감염병에 관한 관심이 대단히 높다. 질병관리본부에서 자주 사용하는 용어 중에 ‘엔(n)차감염’이라는 복합어가 있다. 엔차감염은 감염의 발생 단계를 설명하는 말의 하나이다. 즉 한 감염병이 특정 집단에서 어떤 사람에게 처음 발병했을 경우를 일차감염이라고 하고, 일차감염 환자에서 또 다른 사람에게 전파되었을 경우를 이차감염이라고 하며, 삼차감염 이상의 발병 경로를 잘 모르는 후속 단계의 감염을 통틀어 엔차감염이라고 말한다. 수학이나 통계학에서 잘 모르는 수를 상징적으로 로마자 알파벳의 ‘n’을 사용하여 표기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맥락에서 나온 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엔차감염이라는 말에 대해 거부감이 있고 그동안 민원이 많이 들어왔는지는 몰라도, (네이버 검색 결과)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엔차감염 대신에 ‘연속감염’ 또는 ‘연쇄감염’이란 말을 추천한다는 보도 자료를 내놓았다. 일리 있는 권장 용어라고 생각은 든다. 혹시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다른 우리말은 없는지? 새로운 말에 대해 흥미를 느끼고 생각해 보는 버릇이 있는 나는 ‘후속감염’이란 말도 가능하다고 2020년에 열린 의학한림원 용어 연구집회(워크샵)에서 별도로 제시한 바 있다. 위에 언급한 ‘연속감염’, ‘연쇄감염’, ‘후속감염’의 세 가지 용어는 모두 비슷하고 전체적인 의미 파악에도 흠잡을 데가 별로 없다고 보나, 어딘가 원래 용어인 ‘엔차감염’이 추구하는 의도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는 생각도 든다. ▲ 그림 1. 보건복지부에서 제작한 감염경로 사례 안내문 이 원고를 작성 중에 불현듯 우리말의 ‘몇’이 위에 언급한 ‘n’과 매우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우리말샘 사전에서 ‘몇’을 검색한 결과 다음과 같이 정의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몇 「001」 「수사」 ((흔히 사람을 뜻하는 명사 뒤에 쓰여))그리 많지 않은 얼마만큼의 수를 막연하게 이르는 말. 몇 「002」 「수사」 ((주로 의문문에 쓰여))잘 모르는 수를 물을 때 쓰는 말. 몇 「003」 「관형사」 뒤에 오는 말과 관련된, 그리 많지 않은 얼마만큼의 수를 막연하게 이르는 말. 몇 「004」 「관형사」 ((흔히 의문문에 쓰여))뒤에 오는 말과 관련된 수를 물을 때 쓰는 말. 위의 정의에 의하면 ‘엔차감염’을 ‘몇차감염’으로 번역한다고 해도 큰 무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몇차감염은 위에 언급한 다른 용어들보다 직역에 더 가깝게 느껴지므로, 일반인들이 의역한 용어들을 더 편하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다. 전문용어 가운데에는 ‘erythropoietin’을 ‘에리스로포이에틴’으로 표기하듯이 외국어 단어를 소리 나는 대로 한글로 표기한 음차어가 많다. 이 경우 erythropoietin을 우리말로 ‘적혈구형성인자’라고 번역하여 사용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유난히 음차어를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다. 조기에 공론화되고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갖고 토의할 경우 이런 음차어 부류의 전문용어는 새로 제시되는 쉬운 우리말이 비교적 잘 정착되는 편이다. 따라서 엔차감염은 위에 제시된 우리말 중 어느 하나로 추후 정착될 가능성이 높다. 엔차감염이 우리말로 어떻게 정착되는가를 바라보는 것은 내게 다소 흥미거리가 아닐 수 없다. ▲ 그림 2. 세계를 뒤덮은 코로나를 표현한 그림 우리나라 전문용어는 과거에는 일본학자들이 주로 한자어를 사용하여 번역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일부 변형한 것을 대부분 사용해 왔다. 그러나 이는 이미 한계에 도달했을 뿐 아니라 의학계를 예로 들어 볼 때 일본은 요즈음 외국어를 우리보다 더 많이 사용하고 있고 새로운 용어들을 적극적으로 번역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의 언어학계에서는 고유어를 활용하는 한국 의학계의 참신한 시도에 오히려 관심을 표명하고 있는 실정이라, 일본 학자들에게 더 이상 의존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따라서 개념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전문가 집단이 원어에 대한 적절한 우리말 전문용어를 먼저 제시해야 할 필요성이 점점 증대되고 있다. 새로운 우리말을 아무리 잘 만들어 냈다고 하더라도 이를 받아들여 우리말 어휘로 공식적으로 정착시키는 일이 간단하지는 않다. 이 경우 역설적인지는 모르지만 전문가 집단의 저항을 어떻게 설득하는가가 가장 어려운 문제이다. 같은 전문가 집단에서도 음차어 선호도는 개인마다 상당히 차이가 나며 유난히 음차어를 집요하게 선호하는 사람들이 있어 새로운 우리말 정착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음차어로 된 전문용어 사용의 가장 큰 문제점은 처음 듣는 일반인이 설명을 듣기 전에는 그 말의 의미를 알기 어렵다는 점이다. 즉, 음차어를 쓰면 의사소통의 효율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그 말의 의미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괴리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음차어를 오래 쓰다 보면 점차 그 음차어에 익숙하게 되어 그 말이 정말 좋은 것 같이 착각하게 된다. 따라서 초기에 원어를 우리말로 잘 번역해 사용하지 않으면 시간이 갈수록 이를 고치기 어렵다. 이러한 점에서 컴퓨터의 발달 덕에 여러 분야 사람들이 함께 조기에 토의할 수 있는 공론의 장이 확대되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아울러 이와 같은 방향은 새로 나타나는 전문용어의 우리말 제작과 정착을 점차 활성화할 것이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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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자 : 은희철
- 등록일 : 2021.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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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라기보다는 ‘한반도 평화 정책’ 윤영상 / 북한학박사 윤영상/북한학박사 (재) 와글 정책위원 및 서울연구원 초빙연구원 역임 ‘남북통일의 실질적 의미와 법제통합’, ‘남북한 국가승인과 국가연합’ 등의 논문과 공저로 『남북연합연구』가 있음 정보통신 기술이 발달하면서 지구촌의 여러 나라가 시공간적 제약을 넘어 가까워지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다양한 언어가 섞이고, 융합되는 것은 불가피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경쟁력 없는 언어는 소멸되거나 변형된다. 언어학자들에 따르면 앞으로 100년 안에 전 세계에서 사용되고 있는 7,000개가 넘는 언어 중 절반 이상이 소멸할 것이고, 200년 안에 200-300개 내외의 언어만 남아 있을 것이라고 한다. 우리말은 어떠한가. 다행히 사용자 수를 기록해서 언어의 순위를 매기는 에스놀로그(Ethnologue)에 따르면 2019년 한국어는 7,730만 명, 15번째로 사용자 수가 많은 언어라고 한다. 터키어가 14위, 프랑스어가 16위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말은 적어도 몇백 년 안에는 소멸하지 않을 언어라는 점에서 자부심을 가져도 될 듯하다. 그렇지만 우리말의 가치나 정신을 살리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우리말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표음문자로서 한글은 다양한 소리를 문자로 표시하는 데 탁월하다. 그 결과 다양한 언어를 한글로 표시할 수 있지만, 반대로 우리말 고유의 자리와 가치를 잃어버리는 상황을 맞을 수도 있지 않을까? 살아있되 살아있지 않은 묘한 우리말의 운명이 그려질 수 있는 것이다. 정부나 언론을 비롯해 우리 모두가 우리말의 생명력을 살리기 위해 노력해야 할 이유이다. ▲ 그림 1. 대한민국 정책 브리핑 누리집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설명 내용 중에서 문재인 정부의 대표 정책 중 하나인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얘기를 해보자. ‘프로세스’란 말을 사용하다 보니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정부의 ‘정책브리핑’에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이렇게 설명한다. “분단 이후 70년 가까이 지속돼 온 남북 간 적대적 긴장과 전쟁 위협을 없애고, 한반도에 완전한 비핵화와 항구적인 평화를 정착하기 위한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정책이다. 남북한이 새로운 경제 공동체로 번영을 이루며 공존하는 ‘신 한반도 체제’의 미래를 만들어 나가는 일련의 노력과 과정을 통칭한다.” 이 설명에 따르면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는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평화 실현 정책을 의미하고, 그것을 실현하는 일련의 노력과 과정을 포함한다. 그러면 ‘한반도 평화 정책’이라고 표현하고, 맥락에 따라 ‘한반도 평화 구상’, ‘한반도 평화 실현방안’, ‘한반도 평화 추진과정’이라고 적절하게 풀어쓰면 될 터인데, 왜 굳이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란 말을 사용하고 있을까? 사실 ‘process’란 표현은 이미 우리 사회에 곳곳에서 ‘공정’, ‘과정’과 같은 우리말을 대체해 가고 있다. 제작 프로세스, 업무 프로세스, 입법 프로세스, 행정 프로세스 등등. 어느 순간부터 좋은 우리말을 영어식 표현이 잠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정부와 언론이 그것을 바로 잡아주기는커녕, 오히려 앞서서 주도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언어의 생명력, 생활력을 고려해 볼 때, 정부 기관의 태도는 참으로 무책임하다. 많은 사람이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한반도 평화(추진 또는 실현)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과정’이 어떻게 ‘정책’이 될 수 있지? 당연하게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리고 정부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해설을 확인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그 의미를 알 수가 없다. 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문재인 정부의 대표 정책인지도 알 수가 없다. 1999년 말 미국 클린턴 정부의 대북정책조정관인 윌리엄 페리 전 국방부 장관은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 임동원 통일부 장관과 협의하면서 ‘페리 프로세스’로 불리는 북한 핵문제 해결 및 한반도 평화 실현을 위한 포괄적 해결방안을 마련한다. 한마디로 페리의 한반도 평화 정책을 만들어 낸 것이다. 당시 페리는 이를 ‘김대중 프로세스’, 특히 ‘임동원 프로세스’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때 ‘process’는 ‘peace process’를 의미했다. ‘평화 프로세스’란 말을 평화 정책, 평화 실현 방안, 평화 체제 구축 과정을 포괄하는 의미로 사용하게 된 배경이다. 그 이후 한국 사회에서는 ‘peace process’, ‘평화 프로세스’란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정부에서는 평화 정책, 혹은 평화 정책 추진 과정, 평화 체제 구축 과정이라는 여러 의미를 포함하되, 평화 정책에 방점을 찍었다고 할 수 있고, 시민사회단체들은 평화 정책보다는 주로 ‘평화 체제 구축 과정’에 초점을 두고 사용했다. 그러나 그런 구분조차도 정확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쓰는 사람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기 일쑤였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는 정치인, 관료, 학자, 심지어 사회운동가들조차 습관적으로 사용하던 ‘평화 프로세스’란 말을 정부 정책의 공식 명칭으로 사용하지는 않았다. ‘햇볕 정책’, ‘포용 정책’, ‘평화번영 정책’, ‘한반도 평화 체제 구축’이라는 우리말 표현이 공식적으로 더 부각되었고, 그 결과 ‘평화 프로세스’라는 혼용어는 그것을 보완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미국의 입장을 확인하는 것이 주 업무인 정부 출연 연구기관이나 언론에서 주로 그렇게 사용하곤 했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 등장 이후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 정책의 핵심으로 제시하면서, ‘프로세스’라는 말이 정책, 정책 추진 과정이라는 단어를 대체하기 시작한다. 뒤이어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박근혜 정부의 한반도 평화 정책이 실패했다고 규정하면서, 2017년 베를린 선언을 계기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전면에 내세운다. 이전 정권과는 다른 정책 내용을 내세웠으나 그것을 담고 있는 명칭에서 ‘프로세스’라는 말은 제거하지 않았다. 세 차례에 걸친 남북정상회담과 두 차례에 걸친 북미정상회담은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와 떨어뜨려 설명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란 말 대신에 ‘한반도 평화 정책’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은 어쩔 수 없다. ‘정책’이라는 말은 정책 목표와 수단을 포함하는 의미가 있다. 따라서 ‘한반도 평화 정책’은 한반도 평화의 실현이라는 목표와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의 배치를 포함하는 것이다. ▲ 그림 2. 대한민국 정책 브리핑 누리집(www.korea.kr) 차림 모습 지금 우리나라의 여론과 정책을 주도하고 있는 정부 기관과 언론, 학계에 종사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관성적, 의도적으로 우리말 대신 외국어 표현을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행태가 널리 퍼져 있다. 정부 정책을 알기 쉽게 설명하는 ‘정책 해설’이라는 말을 놔두고, ‘정책브리핑’이라는 말을 더 선호하고 있는 현실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지금 청와대나 서울시 등 주요 정부 기관 누리집에 가보라. 카드뉴스, 뉴스룸, 뉴딜, 포털, 데이터, 스토리, 포럼, 인포그래픽스 등의 표현이 큰 글씨로 주요 공간과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말은 우리 삶과 문화에서 살아 있는 소통의 매개체이다. 정부 기관과 언론, 학계 등이 우리말의 생명력을 키워나가는 사랑꾼 역할을 하지 않고, 정반대로 우리말의 생명력을 파괴하는 해침꾼 역할을 하는 현실을 바꾸기 위해 노력할 때이다. 시민들의 따끔한 감시와 질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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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자 : 윤영상
- 등록일 : 2021.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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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물과 언어 – ‘모빌리티’를 보면서 최기영 / 인하대학교 항공우주공학과 교수 최기영 인하대학교 항공우주공학과 교수 (전 인하대학교 국제화사업단장, 현 교무처장) 무인기 개발, 항공우주관련 각종 정책 자문 등 업무 수행 몇 해 전에 유학생 유치와 교류 확대의 목적으로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들을 돌아다녔다. 중앙아시아는 소련이 해체된 후 독립한 5개의 국가로 구성된 지역으로, 과거에 투르키스탄이라고 부르던 곳이다. 투르크(돌궐) 사람의 땅이라는 뜻이다. 이들 국가의 언어는 알타이어족에 속하는 것으로, 지역별로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서로 간의 일상적 소통은 문제가 없는 수준이다. 이 출장길에 우즈벡인 직원 한 명과 같이 다녔다. 우즈벡은 과거 실크로드 교역의 중심지로 사마르칸트의 고구려 사신도로 우리에게 친숙한 곳이다. 오랜 기간 동안 동서 교역의 중심이었던 만큼 다양한 인종이 함께 산다. 중국에 50여 개의 소수민족이 있다고 하는데, 우즈벡은 인구 3천만 명에 150개가 넘는 민족이 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언어도 다양해서 우즈벡인은 적어도 두 개 이상의 언어를 할 줄 안다. 공용어인 우즈벡어를 기본으로 서남쪽은 이란과 가까워 페르시아어까지 함께 쓴다. 오랜 기간 소련에 속해 있었기에 도시에 사는 노인들은 러시아어가 더 편하기도 하다. 동행했던 이 친구는 한국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현지 한국 회사에서 꽤 오랫동안 근무한 덕에 가끔 깜짝깜짝 놀랄 정도로 한국말을 잘했다. 게다가 러시아어와 영어도 잘했기에 어느 나라를 가든 통역으로 든든했다. 한 번은 함께 터키에 갔는데,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그쪽 운전기사와 이야기하는 걸 보고는 깜짝 놀랐다. 그래서 터키어도 배웠느냐 물었더니, 그건 아니고 터키어도 같은 어족에 속해서 기본적인 말은 서로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언어에 특별히 소질이 있는 친구여서 그러려니 했지만, 궁금해서 어떤 말들이 주로 다르냐고 물어봤다. 그랬더니 ‘비행기’를 예로 들었다. 비행기를 터키어로는 ‘우착 uçak’이라하는데, 우즈벡어로는 ‘사말리오트 samolyot’라고 한다. 우즈벡어 samolyot는 러시아어 ‘써말리오트 самолет’에서 왔다. 우즈벡이 소련에 편입된 것이 1924년이고, 비행기가 우즈벡에서 일상적으로 날아다닌 것은 그보다 훨씬 뒤의 일이니 소련이 비행기와 함께 들여온 러시아어가 우즈벡에서도 사용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문물의 발달과 함께 단어들은 계속 새롭게 만들어지고, 그 문물이 수입될 때 단어들도 함께 들어오기 일쑤다. 사신도: 사마르칸트 아프로시압 궁전의 사신도 우리가 요즘은 드론이라는 걸 자주 보게 되고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그 말을 쓴다. 드론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기 전에는 이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무인기라는 단어를 주로 썼다. 영어권에서는 Unmanned Aerial Vehicle 혹은 줄여서 UAV라고 쓰는데, 이걸 그대로 번역하면 무인항공기 또는 무인기가 되는 것이다. 라이트 형제가 동력 비행에 처음 성공한 것이 1903년이었는데 불과 10-20년 후에 혼자서 날아가는 무인기가 등장했다. 물론 그 당시의 무인기는 주로 군사용이고 성능도 지금보다 형편없었지만, 이처럼 무인기의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되었다. 1930년대 영국군은 무선 조종기로 날리는 비행기를 개발해서 훈련에 쓰고 있었고, 그걸 본 미국도 역시 같은 방식으로 무인기를 개발했다. 당시 영국의 무인기 이름은 Queen Bee(여왕벌)였는데 이걸 개량한 미국인들은 자기들 무인기에 Drone(수벌)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여기서 우리가 쓰는 드론이라는 용어가 유래하였다. 취미용으로 가지고 다니며 사진이나 찍고 하는 드론이 이제는 승객을 싣고 복잡한 도심을 가로질러 다닐 수 있도록 개발되고 있다. 아직은 개발 단계이지만, 전문가들은 이 시스템이 도심의 교통체계를 바꿀 혁명적 수단이자 미래의 주요 산업 중 하나가 될 것이라 전망한다. 이런 항공기를 언론에서는 ‘드론 택시’라고 부르고 전문가 집단에서는 Urban Air Mobility(도심 항공), 줄여서 UAM이라고 한다. UAM-Cover: 미래 도심 항공운송 체계 (미국 나사NASA) 이처럼 기술의 발전이 점점 더 빨라지면서 새로운 물건과 서비스들이 등장하고 그에 맞게 새로운 말들이 어마어마한 양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도심 항공을 포함한 미래교통체계를 나타내는 말로 많이 쓰는 것이 스마트 모빌리티라는 용어다. 물론 이 말도 우리보다 좀 더 일찍 이 분야에서 기술 개발을 시작한 미국에서 유래한 것으로, 우리말로는 지능형 교통체계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 것 같다. ‘지능형 smart’이라는 단어에서 유추해보면 자율주행 기능이 들어가서 교통상황을 인지하며 목적지까지 빠르고 안전하게 데려다 줄 수 있는 수단인데, 실제 스마트 모빌리티는 이 범위를 넘어서 차량 공유, 친환경 등의 개념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한편, 전동킥보드 같은 이동 수단을 언론에서는 퍼스널 모빌리티라 부르는데, (교통 안전을 담당하는) 경찰에서는 이를 ‘개인형 이동장치’라 부른다. 하나의 용어가 사람마다 분야마다 의미하는 바가 다르고 나라마다 쓰임새가 다를 수 있다. 영어권에서는 교통수단을 나타내는 transportation과 구별하여, 원활하게 이동할 수 있는 체계를 모빌리티라 정의하기도 한다. 내가 차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모빌리티를 확보했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차가 있어도 꽉 막힌 도로 한가운데 있으면 모빌리티는 없는 상태인 것이다. 이처럼 파생 기술과 제품이 빠르게 늘어남에 따라 용어와 물건 또는 기술을 1 대 1로 맺어주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OPPAV: 풍동시험 중인 미래형 개인비행기 (항공우주연구원) 블록체인, 오버더탑(OTT), 메타버스, ... 어떻게 보면 우리 일상 속에 이미 깊이 들어와 있거나 가까운 미래에 우리 삶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것들인데 그 단어만 봐서는 무엇인지 짐작하기 어려운 용어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끊임없이 주변을 둘러보고 공부하지 않으면 금방 뒤처지는 느낌을 받는다. 이런 새로운 용어와 기술에 대한 적응도는 세대와 계층을 가르는 경계석이 될 것이다. 국어의 위기다. 우리말의 구조야 바뀌지 않겠지만, 새로운 문물에 관련된 단어들은 외국어 또는 신조어로 가득할 것이다. 더군다나 그 개념조차 사람마다 다르게 쓰일 수 있다. 나라에서 모든 단어를 정의할 수도 없고 또 그렇게 하는 게 바람직하지도 않지만, 핵심이 되는 사물, 기술, 개념에 대해서는 사회가 공용으로 쓸 수 있는 표준 단어의 제정이 필요하다. 마치 우한 폐렴, 신종 코로나 등 다양한 이름이 혼용될 때 코로나바이러스라는 용어로 통일했던 것처럼. 그리고 ‘모빌리티’의 쓰임새에서 알 수 있듯이, 이를 사용 분야에 알맞은 구체성과 추상성을 담은 용어로 번역하려는 유연성과 창의성을 견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단 하나의 말로 1:1 대응이 불가능하니 그냥 외국어를 쓰자는 쪽으로 기울어져 개념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소통하는 데에 한계를 자초할 것이다. 덧붙여, 이러한 새로운 용어를 만들 때 북한과 협력해서 하면 어떨까 제안한다. 북한은 우리보다 훨씬 엄격하게 한글전용주의를 실시하고 있고, 외국어를 가급적 우리말로 뜻풀이해서 쓰고 있다. 어떤 단어들은 그 기발함에 놀라기도 한다. 앞의 우즈벡-터키어의 분화에서 본 것처럼 언어는 문명의 발전에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지금과 같이 문물이 빠르게 변하는 시대를 겪고 난 후에 남한과 북한 사이에서 언어의 이질감은 더욱 커질 것이고 그만큼 마음의 거리도 멀어질 것이다. 우리의 동질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공통된 언어의 사용이 필수이다. 우리가 4차 산업혁명을 겪고 있다고 하는데, 나날이 새로운 물건들이 쏟아져 나온다. 전 세계가 인터넷과 편리한 항공운송 체계를 바탕으로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생각을 주고받는다. 그만큼 새로운 개념이 늘어나고, 신조어도 많이 만들어진다. 정부는 동일한 개념에 동일한 용어를 써야 하는 기본 방침을 확인하고, 이를 실천하는 정책을 지금보다 훨씬 더 강화해야 할 것이고, 이를 바탕으로 한반도 우리 민족 전체가 함께 쓸 수 있는 말들이 정립되면 더욱 바람직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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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자 : 최기영
- 등록일 : 2021.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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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포퓰리즘을 ‘대중주의’라고 말하자 정태석 / 전북대 일반사회교육과 교수 전북대학교 사범대 일반사회교육과 교수비판사회학회 <경제와사회> 편집위원, 한국환경사회학회 감사,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 부소장 역임 저서로 “시민사회의 다원적 적대들과 민주주의”, “행복의 사회학”, “한국인의 에너지, 평등주의” 요즘 정치권에서는 ‘포퓰리즘(populism)’이라는 말이 자주 사용되고 있다. 의미는 대체로 부정적인데,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정치적 상대방을 비판하거나 공격하기 위해 동원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포퓰리즘이 엘리트나 소수 지배세력이 아닌 다수의 일반 사람들을 지향하는 용어임에도, 실제로 일반 사람들은 이 용어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 뜻을 이해하기 쉬운 통일된 번역어가 있으면 좋을 텐데, 아직 그렇지 못하다. 물론 우리말로 번역해서 사용하는 경우들도 적지 않지만, 어떻게 바꾸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다양해지기에 차라리 그냥 영어식 표현을 사용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특히 학자들은 번역어 선택 자체가 논쟁적이어서 논란을 피하려고 영어식 표현을 선호하기도 한다. 포퓰리즘의 ‘포퓰러’(popular)는 많은 사람이 좋아하거나 공감하거나 추구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여기서 사람들은 영어로 ‘people’이라고 하며, ‘인민’으로 쓰기도 한다. 그래서 포퓰리즘은 많은 사람(people)이 좋아하거나 공감하거나 추구하는 것을 제공하려는 정치적 이념이나 전략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포퓰리즘이 인민을 지향한다는 점에 주목하면 ‘인민주의’로 번역할 수도 있겠고, ‘대중적인’ 것을 추구한다는 점에 주목하면 ‘대중주의’로 번역할 수도 있겠다. 도밍고 페론 그런데 번역어 선택을 위해서는 포퓰리즘과 관련된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국내 포퓰리즘 논쟁은 1980년대 남미의 민주화 이론과 종속이론이 도입되는 과정에서 시작되었다. 1946년 남미의 아르헨티나에서 노동자들의 지지에 힘입어 대통령에 당선된 육군 대령 후안 도밍고 페론은, 집권 후 친노동자 정책을 실행하여 정치적 지지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때 포퓰리즘은 대통령이 지방 토호 중심의 과두제적 엘리트 지배에 맞서 노동자 대중의 이익을 실현할 수 있게 한 중요한 정치이념이자 전략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포퓰리즘은 ‘민중주의’로 번역할 수도 있는데, 이때 민중은 좀 더 능동적이고 긍정적인 존재로 인식된다. 하지만 포퓰리즘이 민중을 정치적으로 동원하기 위한 집권세력의 정치전략이라는 의미를 지니기도 하기에, 정치적 입장에 따라서 부정적인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때 민중이 동원되는 대상으로 규정되면, 민중은 능동적이기보다는 수동적인 존재가 되어버린다. 그런데 남미의 포퓰리즘이 국내에 소개된 시기를 생각해 보면, 포퓰리즘은 부정적인 의미로 해석될 운명을 지니고 있었다. 80년대 초는 민주화의 기회를 쿠데타로 억누르고 등장한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이 통치하던 시기였다. 전두환은 취약한 정치적 정당성을 만회하기 위해 부정부패 척결, 정의사회 구현, 과외 금지, 프로야구 출범, 문화적 개방, 경제성장 등 대중들의 인기를 끌 수 있는 가치나 정책을 적극적으로 제시하고 또 추구하였다. 하지만 시민들의 민주화 요구와 노동자들의 권익 요구에 대해서는 지속하여 억압하였다. 여기서 인기영합적 정책을 통해 대중들의 지지를 끌어내고자 한 전두환의 정치전략은 포퓰리즘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포퓰리즘은 ‘대중영합주의’나 ‘대중추수주의’로 번역되었고, 이후 군사독재정권의 전통을 이어간 보수 정치세력의 인기영합적 정책들을 비판하기 위한 용어로 사용되었다. 물론 지금은 또 다른 맥락에서 정치적 상대 세력을 비판하기 위한 일반적 용어로 사용되고 있지만 말이다. 사실 포퓰리즘은 기본적으로 다수 대중의 지지를 얻고자 하는 정치이념이자 전략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점에서 민주주의 사회의 정치세력들은 기본적으로 포퓰리즘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러면서도 대립하거나 경쟁하는 정치세력들은 서로를 비판하거나 비난하기 위해 포퓰리즘이라는 용어를 전략적으로 동원하게 된다. 그래서 서로의 정책에 대해서 현실적으로 감당할 수 없어 인기영합적이라거나, 단기적이고 임시방편적이라거나 하면서 비난하게 되고, 이런 부정적인 맥락에서 상대방의 이념이나 정책에 대해 포퓰리즘이라는 딱지를 붙이려고 한다. 이처럼 포퓰리즘에 대한 양면적 해석이나 규정이 가능하다는 점을 현실 정치적 맥락에서 이해한다면, 포퓰리즘은 그 본래의 의미, 즉 엘리트 지향에 맞서 ‘대중적인’ 것을 추구한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대중주의’로 번역하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인민주의’나 ‘민중주의’는 아무래도 긍정적인 의미에 치우쳐 있고, ‘대중영합주의’나 ‘대중추수주의’는 부정적인 의미에 치우쳐 있다. 그래서 ‘포퓰리즘’이 그러하듯이 정치적 맥락에 따라 또는 정치적 입장에 따라,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고 부정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번역어로 ‘대중주의’가 가장 적절해 보인다. 대중들이 이해하기 쉬운 우리말을 사용하다 보면, 아마 그 의미도 더 친숙해지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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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자 : 정태석
- 등록일 : 2021.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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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슈퍼위크’가 밝았다고? 이광연 / 와이티엔(YTN) 앵커 2022년 3월의 20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여야 예비 주자들의 대선 출마 선언이 잇따르면서 대선 시계도 빨라지고 있다. 와이티엔을 비롯한 언론들은 대선 주자들의 행보나 일정, 이들의 정책 공방을 코로나19 관련 속보와 함께 주요 뉴스로 다루고 있다. 그런데 최근 정치부 뉴스를 검색해 보면 언론들은 지난 6월 마지막 주를 이렇게 규정한다. 대선 슈퍼위크. “대선 슈퍼위크가 시작됐습니다.” “대선 주자들 총출동, 슈퍼위크 밝았다.” 실제로 6월 마지막 주에 대선 정국이 크게 출렁거렸다. 여당은 예비후보 등록 시작과 함께 일부 후보들이 단일화를 발표했고, 야권에서도 대선 출사표를 던지거나 현직을 사퇴하며 정계 진출을 준비하는 등 분주한 일정이 이어졌다. (물론 시간이 흐른 지금 돌아보면 어떤 주도 ‘슈퍼위크’가 아닌 주는 없을 정도이지만) 정치를 비롯해 부서별로 승인된 기사가 방송국에서는 ‘뉴스 런다운’이라고 부르는 진행표에 올라오면 앵커들은 미리 읽어보고 피디들은 자막을 준비한다. 이때 미처 발견하지 못한 오타를 확인하고 오독을 줄이기 위한 정교한 과정을 거치는데 시청자에게 낯선 용어나 불필요한 외국어 단어가 없는지도 매의 눈으로 걸러낸다. 피디나 앵커 눈에 띄면 가차없이 이해하기 쉬운 말로 대체한다. 20년 전 와이티엔에 입사하고 한글문화연대를 통해 우리말글에 대한 애정과 개념을 자리 잡으면서 나름대로 뉴스 진행을 할 때만큼은 어려운 용어나 외국어를 쉬운 우리말로 바꾸려고 노력한다. 익숙하지 않은 외국어를 우리말로 바꾸면 발음하기도 쉽고 뉴스 전달력도 좋아진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유례없는 위기 상황이 길어지면서 외국어를 포함한 다양한 신조어들이 뉴스에 등장하고 있지만 크게 고민하지 않고도 우리말로 바꿀 수 있다. 이를테면 코로나 블루는 코로나 우울감으로 언택트 문화는 비대면 문화로, 낯선 한자어인 비말은 침방울로 말이다. 이 밖에도 부스터샷은 ‘추가 접종’으로, 홈코노미는 ‘재택경제 활동’으로 리셀 테크는 ‘재판매 투자’로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침방울과 추가 접종을 발음해 보자, 진행자는 말하기 쉽고, 시청자는 듣기에 편하다. 그런데 슈퍼위크처럼 마땅한 우리 말을 찾기 어려운 외국어 단어가 등장하면 고민이 길어지고 때론 난감하다. 슈퍼위크란 대단히 좋은 한 주, 정점을 찍는 한 주, 더 중요한 일이 있는 한 주로 풀이할 수 있는데 사전적 의미와는 별개로 정치나 외교 기사에서 쓰이는 ‘슈퍼 위크’라는 단어가 품고 있는 긴장감을 대체할 우리 말을 찾지 못해 무기력하게 ‘대세’를 따르기도 한다. 팩트 체크나 네거티브 공방도 비슷한 예이다. 우리말로 바꿨을 때 오히려 어색해지거나 단어의 ‘숨은 뜻’까지는 전달되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쉬운 우리말 쓰기에 대한 강박 수준의 의지가 현실을 못 따라가기도 한다는 점을 고백한다. 더불어, 인용하거나 보도의 주목도를 높이기 위해 불가피하게 외국어를 대체하지 못하고 그대로 노출할 수밖에 없는 고충도 양해를 구하고 싶다. 물론 이와 같은 현실과 고충에도 불구하고 특히나 사실과 정보 전달이 목적인 뉴스 프로그램에서 우리말로 표기하고 발음하는 것은 방송인의 책무라고 생각한다. 와이티엔 역시 앵커와 기자, 피디 등 뉴스 제작에 관련된 구성원들은 일부 대체가 어려운 경우를 빼고는 우리말을 우선순위에 놓고 기사를 작성하거나 편집한다. 난해한 용어와 외국어 단어를 쉬운 우리말로 다듬어야 하는 이유를 묻는다면, 방송을 보는 시청자 중에 소외되는 사람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강조하고 싶다. ‘팩트 체크’ 나 ‘슈퍼 위크’를 뉴스에서 듣고 혹시라도 소외되는 시청자가 있다면, 그들의 마음이 어떨지 상상해 보라. 기사를 쓰거나 읽을 때 최소한 '사실 확인', '절정의 한 주'라고 우리말 뜻풀이를 넣는 성의라도 보여야 한다. 알 수 없는 외계어들 때문에 방송언어가 심각하게 오염되는 지금의 환경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광연 와이티엔 앵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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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자 : 이광연
- 등록일 : 2021.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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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실리테이터, 이제는 ‘소통지도사’ 문제갑 문제갑 농어촌 소통지도사 협동조합 교육 강사 광주광역시청 사무관 역임 저서 <시티즌오블리주>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뒤 국민 참여 공론화 토론회가 전국에 걸쳐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다. 신고리 5, 6호기 재개 문제부터 대학입시제도 개선, 헌법 개정, 미세먼지 대책, 대구·경북 행정통합, KBS의 공적 책무와 같은 주제들이 정부 부처 공직자들 탁자에서 벗어나 국민이 참여하는 숙의형 정책 토론 마당에 폭넓게 펼쳐지고 있다. 이런 추세는 앞으로 더욱 거세어질 것이다. 코로나19로 온 세계가 목숨을 건 싸움을 하고 있는 가운데, 몇 해 전만 해도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 얼굴을 맞대고 하던 대면 회의는 이제 열기 힘들다. 비대면 화상회의로 전환되면서 회의를 주관하는 주최 측의 고민 또한 깊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들은 화상회의에서 회의를 주관하는 사람을 퍼실리테이터(facilitator) 또는 모더레이터(moderator)로 불렀는데 회의에 참여한 사회자들조차 이 용어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사전에서 찾아보면, 퍼실리테이터는 ‘회의 촉진자’로서, 회의 참여자들의 소통과 협력이 원활하도록 돕는 사람을 뜻한다. 모더레이터는 참여자들의 의견을 조정 중재하여 문제 해결을 돕는 사람으로 풀이할 수 있겠다. 두 용어를 때때로 혼용하기도 한다. 농어촌공사 퍼실리테이터 자격증 우리나라 농어촌 마을 단위 공동사업이 잘 추진되도록 돕는 기관으로 농어촌공사가 있다. 마을사업을 계획하고 추진할 때, 회의는 사업의 시작이자 끝이라 할 만큼 중요하다. 농어촌 주민들은 갈수록 고령화되고 있고, 마을사업은 모두가 참여하고 함께 결정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농어촌공사는 무엇보다 회의를 도와주는 전문가 양성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나는 지난 2017년 농어촌공사가 주관하는 자격 과정을 이수하고 재수 끝에 자격증을 땄는데, 이 자격을 얻은 사람을 부르는 공식 이름이 ‘농어촌 퍼실리테이터’였다. “현장포럼을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포럼에서는 우리 마을의 테마와 미션 그리고 비전을 세우고, 마을 자원을 활용해서 어떤 사업을 할지 의논할 거예요. 저는 오늘 회의가 잘되도록 도와드릴 퍼실리테이터입니다.” 마을 회의에 참여하는 주민들 대부분은 60대, 70대 어르신들이다. 마을에 따라서는 80대 이상 되는 분들이 많아 60대는 ‘어르신’ 호칭도 어색한 지경이긴 한데, 이분들 앞에서 포럼(forum)이니 테마(theme)니 미션(mission)이니 비전(vision)이니 하는 말은 아무래도 어렵다. 더욱이 ‘퍼실리테이터’라는 말은 뜻은 고사하고 발음조차 쉽지 않다. 주민들은 대뜸 이렇게 묻는다. “포럼?” “테마니 미션이니 비전이니 그게 다 뭐여?” “퍼... 뭐라고?” <2016년 전남 신안군 자은면 구영마을에서 열린 마을 회의 장면> 지난 몇 년 동안 이 용어를 사용하면서 때마다 뜻을 설명하느라 관계자들 모두 수고가 많았다. 다행히 얼마 전 농어촌공사는 이 같은 현장 사정을 헤아리고는, 공모를 통하여 퍼실리테이터라는 명칭을 알기 쉬운 말로 바꾸기로 했는데, 그 새로운 이름은 ‘소통지도사’였다. 바뀌자마자 이미 퍼실리테이터라는 말에 익숙해진 활동가들은 볼멘소리를 내기도 했다. 소통지도사라 하느니, 그냥 퍼실리테이터로 부르는 게 낫겠다는 것이다. 겸양이 미덕인 우리 정서에 비추어 볼 때, 나이 어린 사람이 웃어른에게 ‘지도’ 운운하는 것이 여간 송구한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생소한 ‘퍼실리테이터’라는 이름도 몇 년간 쓰다 보니, 어색한 태를 벗어버리고 일상 언어가 되었듯이 ‘소통지도사’도 그렇게 익숙해지리라고 낙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비단 퍼실리테이터라는 말만 그런 것은 아니다. 우리의 말과 글을 아끼고 널리 쓰는 것은 민족의 얼을 지키는 가장 근본 되는 일 중의 하나이다. 이런 일을 앞장서서 주관하는 정부 부처가 있다면 문화체육관광부일 것이다. 되도록 정부에서 쓰는 행정용어나 이름 정도는 우리 말과 글을 쓰도록 행정지도(!)하면 좋지 않을까. 말 나온 김에 하자면, 적어도 대통령 신년사나 광복절 기념사 정도는 순우리말로 들어보고 싶다. 이 연설문을 초중고에서 읽고, 자라나는 세대들이 우리말글을 새기는 기회로 삼는다면 얼마나 큰 효과가 있을 것인가. 우리 말글에 대한 자부심 또한 대단해질 터이다. 온 세계가 한류에 감동하고 우리의 말과 글을 배워 보겠다고 난리인데, 정작 우리나라의 말과 글은 국적 없이 떠도는 외국말투성이 형국이니, 참으로 한류 광풍이 무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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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자 : 문제갑
- 등록일 : 2021.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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